“사회적 약자에겐 질병도 가혹하다”

평화뉴스
  • 입력 2005.05.22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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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의료진단 2> 이상원.
...“빈곤과 질병, 그 고통스럽던 시절의 기록”


유령은 옷자락 속에서 두 아이들을 밀어 냈다.
그 아이들은 너무나 쇠약해서 보기에도 아주 흉했다. 보기만 해도 심술궂고 욕심이 많아 보였다.

스크루우지: 아니! 어디 아픕니까? (놀라서 뒤로 뒷걸음친다.)
현재의 유령: 그렇지 않아!
스크루우지: 어째서 이 아이들이 당신 곁에 있습니까?
현재의 유령: 풀어 놓으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내가 맡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건 인간들이 낳은 자식이야.
사내아이를 ‘무지’라 하고 계집애는 ‘가난’이라고 부르지. 이런 두 아이를 조심해야만 해.
특히 사내아이는 더 조심해야 해. 무지 다음에 오는 것은 멸망이니까.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롤’ 중에서)


빈곤과 범죄와 질병은 흔히 함께 나타나는 법이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어디에선가 ‘죽음이여, 공평하도다! 돈도 빽도 소용없으니!’라고 하였다. 지당한 말씀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과 질병은 전혀 공평하지 않기도 하다. 죽음과 질병은 철저히 인간을 차별한다. 그것도 치사하게 돈 없는 자를 차별하여 괴롭힌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질병도, 죽음의 신도 가혹하다.

1997년 12월 IMF 금융차관을 들여오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대폭 가해졌다. 당대비평의 편집인인 조세희씨는 당시 노사정위원회에 대하여 “나라 일이라면 유독 약했던 노동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자기를 자르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일이었다고 하면서 애통해하였다. 대규모의 실업이 발생하여, 실업자의 수는 1998년 2월과 2000년 3월 사이에 백만명이 넘어 최고치를 기록하였고 그 후에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대구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의 박정한 교수 연구팀은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통계청에 보고된 사망자료를 이용하여 IMF의 요구에 따른 구조조정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시기를 전후한 실업률 변동과 특정원인으로 인한 사망자수 변동을 조사한 바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연간 조사망률은 1995년 인구 100,000명당 524.0에서 1996년 514.4로 감소하다가 1997년 516.6으로 약간 증가하였고 1998년은 변화가 없다가 1999년 522.9로 크게 증가한 후 2000년 다시 감소하였다. 연령 보정 표준화사망률은 1995년 595.4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였으나 1997년부터 전년대비 감소율은 낮아졌다. 1997년에서 1999년까지 조사망률은 증가하였는데 표준화사망률이 감소한 것은, 이 시기의 사망자 중에 특히 고령자들이 많았던 데에 기인한다.

사망원인에 따라 사망률의 변화 양상은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 패혈증으로 인한 사망, 영양실조가 있는 경우의 사망, 그리고 자살에 의한 사망은 실업자 수의 변화와 매우 밀접한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대략 아래와 같은 표로 나타낼 수 있다.


이 자료는 통계청에 신고된 사망자료로부터 도출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망신고자료를 100% 신뢰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IMF가 왜 도래했는가, 그것이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는 목소리는 있었어도, 그것이 우리 국민들을 얼마나 살해하고 지나갔는가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된 분석이 많지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이런 생태학적 자료를 가지고 그 파괴력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패혈증 사망이 유독 실업률과 함께 증가하였는가? 패혈증의 여러 원인 중 하나는, 초기의 감염이나 손상을 조기에 적절히 치료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으로서의 측면이 있다. 비록 증명 작업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타격이 의료서비스 접근성을 저해하였다는 가설을 설정해 볼 수는 있다.

과연 빈곤이 이러한 질병 사망에 관련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사망원인에 의한 것으로 보고된 사망자들의 사망률을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분석하여 본 결과, 농촌지역 주민, 중년 이상의 연령층, 교육수준이 낮은 인구 등에서 특히 사망률이 높았다.
따라서 적어도 이 자료로부터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이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인구가 젊고 부유한 도시사람들보다 더욱 큰 건강과 생명의 타격을 받은 것으로 결론짓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대체로 농촌 지역의 경우 도시보다 고령 인구의 비율이 많고, 이들이 또한 교육수준이 낮은 편임을 감안해야 한다. 불행은 겹치는 법이다. IMF 구조조정 시기의 기록은 책상위의 문서에 놓인 통계수치가 아니라, 구조조정의 찬바람 속에 쓰러져 죽어간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보장정책 등을 논함에 있어서, 형평과 효율은 흔히 상반되는 가치로 거론된다. 형평을 위하여, 다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약자를 방치하지 않기 위하여 만들어가야 할 국가의 사회보장 정책은 윤리적으로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한편으로는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을 저해함으로써 국가의 경제 발전에 반하는, 말하자면 양날의 검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따라서 시장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사회보장정책이 수혜자들의 의존성을 키우고 예산의 낭비를 가져온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그러한 지적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런 논의는 일정부분 사회보장체계가 작동되는 상황에서 이를 운영하거나, 여러 단위 정책 간의 우선순위를 논할 때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회보장체계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에 따른 형평과 효율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거기에는 형평성도 효율성도 양자 모두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최소한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보장체계는 존재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 인간의 사회가 동물들의 군집과 다른 것은, 합리적인 사회는 약자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상원(의사.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전임강사)


* [인의협]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줄임말로, 5월부터 시작한 평화뉴스 <인의협의 의료 진단>은, 대구경북인의협 회원들이 의료정책과 의료계 관행, 건강 문제 등을 매주 돌아가며 짚어줍니다 - 평화뉴스

(이 글은, 2005년 5월 14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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