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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가르치는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참교육을 외쳤기에 더 부끄럽다”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일만이 교사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2005년 06월 02일 (목) 12:45:53 평화뉴스 pnnews@pn.or.kr

오늘은 창가로 뚝뚝 떨어져 내리던 부드러운 달빛마저 없다.
외딴 암자처럼 적막한 교실, 가끔 조심스럽게 내뱉는 잔기침 소리가 상념에 젖어있는 나를 깨운다.

물끄러미 아이들을 바라본다.
수학 문제 푸느라고 끙끙대는 녀석, 문제집 정답해설서 뒤적거리고 있는 녀석, 이어폰 귀에 꼽고 무협지에 빠져있는 녀석, 참고서 밑에 만화책 숨겨놓고 보고 있는 녀석, 책 더미에 얼굴 파묻고 자는 녀석, 열심히 문자 보내고 있는 녀석……
그래도 아이들은 여유가 있고 평화롭다. 마음을 닦는 수도승처럼.

이 아이들은 머리 싸매고 공부해본 적이 거의 없다.
공부 못한다는 죄목으로 갖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냥 열심히 학교를 다녔을 뿐이다.
학교에 오는 것이 그저 평안하기에, 학교 아니면 마땅히 갈 곳이 없기에...
책을 5분 이상 집중해서 보기는 힘들어도 책상에 버티고 앉아있는 기술은 과히 달마의 경지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교실을 지킨다.

이 아이들과 함께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가 나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다.
각박하고 삭막한 시대의 속박에서 잠시 벗어나서 가만히 내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책 속에 빠지기도 하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문득 슬퍼지곤 한다. 하고 싶은 것 다 포기하고 그 작은 공간에 매여 있는 아이들이 불쌍하고, 마치 교육을 위해 애쓰는 척 하고 있는 내 창백한 위선의 얼굴이 애처롭다.

"학교는 아직도 병영처럼 딱딱하고 황폐하다. 학교는 아이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공간일 뿐..."
"그동안 밥그릇 지키는 방법만 궁리해 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참교육’을 외쳐온 전교조 교사이기에 더 부끄럽다"


학교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해직교사들이 돌아오고,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독재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민주 세상이 열렸다지만, 학교는 아직도 병영처럼 딱딱하고 황폐하다. 학교는 아이들을 감시하고 훈육하는 공간일 뿐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적성과 개성을 빼앗긴 채 순응해야만 한다. 가끔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저항을 해 보기도 하지만.

막내아들 정대는 초등학교 졸업 앨범의 마지막 한마디 란에 ‘드디어 나도 삭발을 하는구나. 아! 슬프도다’ 라는 애끓는 절규를 남겼다. 그리고 입학식 전날 오래도록 소중하게 가꾸어 왔던 정든 머리를 자르고 나서 한 며칠 내내 거울만 쳐다보았다.

큰아들 정원이는 개학 맞이 이발을 하면서 앞머리만 살짝 쳤다가 나와 한바탕 난리를 치뤘고, 결국은 새 담임선생님과 실랑이 끝에 미장원을 세 번이나 들락거리는 노고를 겪었다. 친구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은 욕구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오늘도 터벅터벅 학교를 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반 아이들과 머리 모양을 놓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이들에게 꿈을 키워주는 대화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지난 연말 내내 수능시험 부정행위와 교사의 학생 답안지 바꿔치기, 내신 부풀리기로 시끄럽던 학교가 새 학년이 들어서자 일진회와 학교 폭력과의 전쟁으로 난타당하고 있다. 교사로서 부끄럽고, 모든 책임을 덮어쓰는 게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그동안 교사들이 밥그릇 지키는 방법만을 궁리해 온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참교육’을 외쳐온 전교조 활동 교사이기에 더욱 부끄럽다.

그동안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다. 우리 아이들은 더욱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 교사는 바뀐 게 무엇일까? 우리 교사는, 학교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교육을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문제가 입시 경쟁이라는 싸움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학벌 사회를 해체하고 대학 서열화를 깨뜨려야만 교육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찍 낙오자가 되어 대학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대학 평준화도 학벌 사회 해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학을 나오든 안나오든 모두 평등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도록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남보다 더 높이 되기 위해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참으로 별짓을 다하는 돈과 쾌락의 공화국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시간외근무수당이나 챙기면서 노동조합 교사로 자위하는, 아이들에게 꿈과 자신감도 심어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가르치는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일만이 교사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생전 처음으로 고3 담임을 맡았다.
그래서 새 학년을 맞이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대와 설레임이 컸었다.
그러나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아이들은 아직도 꿈과 열정이 없다. 당당하게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의지가 없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하고도 몇 푼 받지 못하는데, 별 하는 일도 없이 시간외근무수당이나 받아 챙기면서 노동조합 교사로 자위하는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야무지게 꿈과 자신감도 심어주지 못하는 내 무능함이 참 씁쓸하다.

대부분의 주위 교사들이 교육에 대한 고민이나 비판도 없이 교장의 꿈을 안고 씩씩하게 전진하는데, 교육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고 교사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내 꼴이 처량하다.

그렇지만 가르치는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자기가 맡은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일만이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답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어느새 늙은 평교사가 되어버렸지만, 아직은 교단에 선 교사이기에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 무능하지만 스스로의 진실된 삶으로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오늘 밤 흠뻑 봄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밤새도록 유행가 가사처럼 밤비에 젖으며 갑갑한 내 가슴을 씻어내고 싶다.
나와 함께 울어줄 봄비. 대한민국 학교...
<경상남도 진주시. 고등학교 K교사>

선생님이 이 글을 쓰신 그날 밤, 고맙게도 시원하게 봄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 봄비에 ‘갑갑한 가슴도 대폿잔 한 잔 거나하게 들이킨 것처럼 뚫렸다’고 합니다.
스무해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신 40대 후반의 K선생님. 선생님은 현재 병가를 내고 투병중입니다.
선생님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시는 날, 그 때의 학교는 가뭄의 단비처럼 희망이 가득하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이 빨리 나아지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주신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평화뉴스.


(이 글은, 2005년 5월 25일 <평화뉴스> 주요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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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고백 1> - 대구 초등 L교사 ... "교사라고 말하기 부끄럽다"
<교사들의 고백 2> - 구미 중등 L교사 ... "게으른 나를 탓한다"
<교사들의 고백 3> - 포항 중등 K교사 ... "학교는 죽은 시인의 사회"
<교사들의 고백 4> - 영주 초등 A교사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교사들의 고백 5> - 대구 중등 H교사 ... "잘못된 부교재 관행, 이젠 바로잡아야"
<교사들의 고백 6> - 목포 초등 B교사 ... “학부모에게 접대받는 교사들”
<교사들의 고백 7> - 진주 중등 K교사 ... “교사는 가르치는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교사를 찾습니다”

평화뉴스는 2004년 한해동안 [기자들의 고백]을 연재한데 이어,
2005년에는 연중기획으로 [교사들의 고백]을 매주 수요일마다 싣습니다.
교육의 가치는 ‘학생’에게 있으며, 교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성직’이라 믿습니다.
학생들에게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교무실과 교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연들.
그리고, 우리 교육계와 학부모, 독자들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교사들의 글’을 찾습니다.

남을 탓하기는 쉽지만, 스스로 돌아보고 남 앞에 고백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백들이 쌓여갈 때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 믿으며,
대구경북지역 현직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독자들께서 좋은 선생님들을 추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을 쓰신 분의 이름은 실명과 익명 모두 가능하며,
익명의 신분은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의 : 평화뉴스 (053)421-151 / 011-811-0709
글 보내실 곳 :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PN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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