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어떻게 볼 것인가?”

평화뉴스
  • 입력 2005.09.05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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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의료진단 16] 한동로...
"자유로운 죽음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하여"

매일 아침 회진하면서 입원 환자들을 만난다.
어느 한 병동에는 대다수 환자들이 나이가 많다.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에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 환자들도 있다. 욕창으로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가족에게조차도 버림을 받았다.
어떤 이는 몇 년 동안 그 병실 그 자리에 그렇게 누워있다.
몇 년 동안 미동도 없이 누워 있고 한 마디 의사 표현도 한 적이 없지만 그들은 살아있다.

제 마음대로 죽을 권리도 없다. 아무런 자유가 없다.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두 축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억압으로 간주한다. 인간이 사물이 아니고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이 자유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라는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유로운 존재는 외부의 간섭없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서 ‘스스로 결정을 하고 스스로 행위하는 것’이 바로 자율성이다. 그러니까 자유는 자율성을 기본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의 윤리이론은 자율성의 존중을 하나의 중요한 윤리원칙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와 존 스튜어트 밀이다. 칸트는 모든 인간은 무조건적 가치를 지니며,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갖기에, 한 개인을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다루는 것은 이러한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밀 역시 공리주의 원리에 근거하여 자유를 옹호하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는 자유를 사상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사상의 영역에서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반면, 행위의 영역에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개인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개인마다의 자율적인 행위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행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이의 바탕은 자율적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다.

장기간 입원하고 있는 많은 환자들은 영양의 불균형, 면역성 저하 등으로 많은 합병증을 앓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50대 남자 환자가 뇌졸중과 그 후유증으로 식물인간 상태로 5년 간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호흡곤란으로 기관지도 절개된 상태이고 스스로 음식 섭취가 불가능하여 튜브로 음식을 투여하고 있다. 입원 치료 중에 저하된 면역기능으로 수 십 차례 폐렴으로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 심한 경우 패혈증으로 발전하여 혈압이 떨어져 중환자실 치료도 수차례 받았다. 지금까지는 다행(?)스럽게도 폐렴과 패혈증이 치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여전히 식물인간 상태인 것이다. 점점 보호자도 지쳐가고 경제적 부담을 의료진에게 호소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치료가 과연 잘 된 것일까?

이 환자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를 하여야 할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 지켜야 할 의료윤리의 원칙들이 있다. 자율성 존중의 원칙, 악행 금지의 원칙, 선행 원칙, 정의 원칙이 바로 그것들이다. 하나 하나의 원칙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이 원칙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고, 그때가 치료에 있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 어떻게 치료를 하여야하나?

최근 첨단 의료 장비의 개발과 지식의 발달로 이전까지는 회복하기 어렵게 여겨진 질병의 상태에 대해서도 치료방침이 바뀌어 장기간 동안 광범위한 치료를 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다. 치료법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될 수 있으나 삶의 질이 그에 상응하게 향상되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미없는 치료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의미 없는 치료’란, 그 행위로서 기대되는 생리학적 효과는 달성하지 못하여 환자나 그 가족에 의하여 요구된 생명만을 연장시키는 치료 행위의 중단을 치료자가 수용하고자 할 경우 그 의학적 판단의 정당성을 부여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의미 없는 치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치료가 병태생리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경우, 이전에 동일한 치료법이 환자에게 적용되어 치료효과가 없음이 이미 관찰된 경우, 치료효과가 환자가 구체적으로 요구한 수준으로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음이 분명한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담당주치의라도 환자의 현재 상태를 보고 그 예후를 정확하고 확실한 판단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고, 의사 역시 인간이기에 한 생명체의 치료를 중단 또는 보류할 때 많은 고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자발호흡을 하지 못하는 혼수환자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환자는 사망에 이를 것이다. 이는 악행금지의 원칙을 어기게 될 것이다. 호흡기 수가 한정된 겨우, 회복 가능한 환자에게 필요한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의료윤리의 정의 원칙에 위배될 것이다.

임상 치료 과정에서 항상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혼수상태의 폐렴 환자의 경우 항생제 치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보호자가 강력하게 항생제 치료를 요구할 경우 무조건 따르는 것이 올바른 치료인가? 폐렴환자의 경우 항생제 치료 없이도 치유가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보호자의 요구가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항생제 치료를 하지 않아 수년간 혼수 상태로 있던 환자가 사망한 경우 의사에게 악행 금지의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숨진다.
나는 이것이 지금까지 한 차례의 예외가 없었던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숨지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생명은 그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 사람의 자율적인 판단이 가장 효력이 있다고 본다.

안락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하여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소극적 안락사, 아니 숨질 권리는 누구도 박탈할 수 없는 한 개인의 고유 권한 일 것이다. 수년간 혼수 상태로 있는 환자가 어느 날 폐렴이 생겨 사망한 경우 나는 자연사라고 본다. 의사는 그 자연사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으뜸이 무병장수 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인류의 역사를 일부 발전시켜온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욕망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파우스트’
그는 끝없는 욕망을 찾아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았다. 목적의식이 뚜렷하면 악마의 유혹하는 힘은 강력해지는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간섭하는 오늘의 유전공학의 발전이 언젠가는 숨질 권리마저 없는 참혹한 세계를 만들 것 같은 나의 생각이 기우였으면 한다.
한동로( 대구경북인의협 공동대표. 신경외과 전문의).
* [인의협]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줄임말로, 5월부터 시작한 평화뉴스 <인의협의 의료 진단>은, 대구경북인의협 회원들이 의료정책과 의료계 관행, 건강 문제 등을 매주 돌아가며 짚어줍니다 - 평화뉴스

(이 글은, 2005년 8월 28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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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의 의료진단>

<인의협의 의료진단 1>- 김진국...“창궐하는 암과 정부의 책임” (2005.5.2)
<인의협의 의료진단 2>- 이상원...“사회적 약자에겐 질병도 가혹하다”(2005.5.14)
<인의협의 의료진단 3>- 노태맹...“병원 주식회사?"(2005.5.21)
<인의협의 의료진단 4>- 윤창호... "내게도 '의사 친구'가 있다면..."(2005.5.29)
<인의협의 의료진단 5>- 김건우..."생명에 대한 위험한 유혹”(2005.6.4. 일반외과)
<인의협의 의료진단 6>- 김건우..."의료사각지대, 쪽방 거주자와 노숙인..."(2005.6.12. 진단방사선과)
<인의협의 의료진단 7>- 송광익..."정부와 의사는 환자 앞에 겸허해야"(2005.6.19)
<인의협의 의료진단 8>- 김은경..."자살공화국, 대책은 없나?“(2005.6.26)
<인의협의 의료진단 9>- 이정화..."알레르기 질환과 모유수유권“(2005.7.3)
<인의협의 의료진단 10>- 박기수..."종합건강검진, 제대로 알고 하자(2005.7.10)
<인의협의 의료진단 11>- 김진석...“강자와 약자, 뽑는 자와 뽑히는 자”(2005.7.17)
<인의협의 의료진단 12>- 김병준...“약대 6년제, 무엇이 문제인가?”(2005.7.24)
<인의협의 의료진단 13>- 이종우...“남성의 성(性) 고민을 아십니까?”(2005.7.31)
<인의협의 의료진단 14>- 김성아...“일하면 아픈게 당연한가?”(2005.8.7)
<인의협의 의료진단 15>- 추호식...“이국 땅의 질병, 그 아픔을 어떡하나?”(2005.8.21)
<인의협의 의료진단 16>- 한동로...“안락사, 어떻게 볼 것인가?”(200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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