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우연히 건강보조용품을 파는 공연장을 들리게 되었다.
그 곳에는 70세이상의 남녀어르신이 약 100여명 있었으며, 일부는 좁디좁은 나무의자에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고 일부는 누워 찜질하는 듯 보였다.
난 사실 다른 일로 들린거였는데, 불현듯 이 장소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천장에는 운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만국기 깃발들, 사방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해부도와 설명사진, 제약회사 선전을 방불케 하는 선전문구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서 있는 금빛색 매트와 노래방 기계를 포함한 거창한 기계들...거기는 건강용품을 팔기위해 보통 3개월단위로 옮겨다니는 건강용품을 선전하는 곳이었다.
어르신들은 손안에 표 하나씩 갖고 있었으며 순서대로 맛사지라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들의 입장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발품이라도 팔아 이 곳에 오면, 두둑한 선물도 받고 치료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여기서 상술에 속아, 전기치료 맛사지, 옥매트 등의 건강용품을 몇 개월 할부로 거액을 주고 사는 것이 보통이다..
난 그분들의 얼굴을 안보는 듯, 그러나 유심히 보았다.
거무스름한 그 분들의 얼굴에 패인 깊은 주름은 얼마나 고난한 삶을 거쳐왔는가를 거짓없이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이 사회에서 소외되어 주변으로 몰린 쓸쓸함과 피곤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 분들은 자식을 내노라 키우지 못한 죄,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준 죄, 아픈 몸으로 자식들에게 짐만 되는 죄가 겁나서 그 건강용품의 선전에 혹해서 온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퀭한 눈들과 축처진 어깨들, 아예 감아버린 눈을 보며 난 우리사회의 어르신들을 생각했다. “대책없이 오래살게 만드는 사회”
농경사회에서는 이 어르신들이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도의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오늘의 최첨단 산업사회에서 그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세대, 무능력한 세대, 판단력이 기민하지 못한 세대, 구세대 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분명 순발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말도 어눌해지고 행동도 빠르질 못해 주변환경의 변화에도 재빨리 반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인들의 장점도 있다. 과거 중국의 공산당에서는 항상 노인들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는데, 노인층은 젊은 층에 비해 긴호흡을 갖고 총체적으로 볼 수 있으며, 너그러운 관용과 포용력을 갖고 있다. 이 세대의 이러한 장점을 보지 않고 노인들을 뒤쳐진 세대로 보는 시각 속에서, 노인층은 아직 정신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늙을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데 어느새 늙어버린 것이다. 이들은 미처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거나 준비할 시간도 없이 노년기에 내팽개쳐 진 것이다.
이들은 해방과 전쟁을 경험하고 한반도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한국의 기적같은 경제적 성장을 일궈낸 주역이다. 또한 자식을 위해 온몸을 바쳤으며 그들 부모들을 최선을 다해 모신 세대이다, 그런데 그렇게 앞만 보고 “죽어라”살던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자신들의 자손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노인세대는 자신을 위한 투자를 스스로도 하지 않은채, 사회에서도 밀려나고 집에서도 짐덩이로 몰리고 있는 세대이다. 이들에게 허락된 “먹고 살 만한” 일자리도 그다지 많지 않고, 그렇다고 “눈치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안정된 노후가 보장된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자식을 키워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 세대의 나이듦...그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의 산업재해의 높은 비율이 아파트경비원층에 있다는 사실이 이 비극을 반추해준다.
즉, 노인들이 뭔가 하기위해 일을 찾아서 밖으로 나오면, 그나마 만만한 것이 아파트 경비원이지만 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재율이 높게 나오는 것이다. 최근의 지표 중 노인층의 자살율이 83년의 14.3명에 비해 5배나 늘은 것도 노인의 “사회적 소외”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지금의 우리세대인 40-50대는 이미 자식덕에 살 생각을 포기한지 오래이고 혼자서 늙을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나름대로 노년을 맞을 “생존면역체계”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노인세대는 자신을 위해서는 제대로 준비해온 것이 없으나, 최선을 다해 자기세대의 역사적 몫을 수행해온 그런 세대였다.
설사 이 세대가 한물간 세대라고 해도, 뒤떨어진 세대라고 해도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자리는, 그 세대의 노력과 희생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앞서간 세대의 시대적 의무이자 책임이며, 뒤쫒아가는 세대의 책임이다. 이러한 세대간의 연대의 책임속에 건강한 세대간의 약속이 또 세대간의 정의가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층에 대한, 특히 가난한 노인층에 대한 사회적 개입과 세대연대를 위한 장기적인 비젼이 마련되어야 한다. 자식세대를 키워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세대의 나이듦은 그렇게 “제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소외될만한 잘못을 한 것이 없다.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서러워져서는 안된다.
나이듦은 키워내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더우기 그렇다.
다 아는 얘기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필자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이런 구구절절 얘기가 늘어가는걸 보면...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어머니 화장대앞에 편지를 써두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아빠 구두닦은 값 500원, 지난 달 산수시험 100점 맞은 값 1000원, 어제 엄마 심부름한 값 500원, 합쳐서 2000원 주세요”
이에 어머니의 답.
“너를 10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며 고통받은 값 무료, 지금까지 너를 입히고 먹이고 공부시켜준 값 무료, 지난 주에 네가 야구공으로 깬 옆집 유리창 변상한 값 무료, 앞으로 네가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 해주는 값 무료, 아들아 사랑한다.”
나하나 기르는데 수많은 이들의 수많은 관계가 들어갔다.
내가 잘난 듯 싶지만 나를 키우는데 내 부모와 이웃, 이 사회와 이 사회를 일궈낸 많은 인프라가 나를 키워낸거다. 나이드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키워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긴 부산물”이다. 나이드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이 만큼 커온 것에 대한 갚음의 의미이다..
나이듦의 문제를 생물학적 수명만 길게하는 방식으로만 풀어서는 안된다.
나이듦의 가치를 인정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말이다. 젊은 것이 무조건 좋다는 시각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를 대변한다 하면서 뉴스의 메인앵커가 젊은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 젊지 않으면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문화, 이미 40대 50대에 정년을 말하는 사회, 오륙도가 일반화된 사회, 이런 사회의 자화상이 고령화사회와 너무 배치되는 것 같아 답답해서 풀어놓은 말이었다.
김재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방송인. 사회학 박사)
* 1960년 서울에 태어난 김재경 박사는, 2001년부터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 '김재경의 여론현장'을 매일 아침 진행하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김재경의 세상보기'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 ‘우먼라이프’ 2005년 1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 평화뉴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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