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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사람들, 그 한(恨)을 어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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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19]...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회적 죽음, 해법은 없는 것인가?”


만추를 지나 입동, 소설을 거쳤으니 이제 바야흐로 겨울의 초입이다.
거리의 나뭇가지마다 잎들을 다 떨구고 앙상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한다. 가을은 수확과 풍요의 계절이지만 겨울은 모든 물상을 제자리에 돌려주는 차라리 순환과 죽음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상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하고 불행할 것인가. 죽음은 세계의 끝이 아니라 창조의 새로운 출발이라는 생각이 가능한 것은 진정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면 욕망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인간의 오만과 교만을 과연 무엇이 진정시킬 수 있겠는가?

부자도 권력자도 뛰어난 학자도 고매한 예술가도 평범한 촌부도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해 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범인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세계의 끝이자 나락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즐거운 것, 달콤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서운 것, 어두운 것, 슬픈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도 바로 죽음이 세상의 끝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근저에는 현세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종교나 별난 신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죽음을 무서워 하고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언론에 여러차례 보도돼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1위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유교권 국가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게 일반인들의 정서일 텐데 자살율이 1위라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이 땅에서 삶이 녹녹치 않고 고통스럽다는 의미도 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심성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는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가을에서 겨울의 문턱으로 넘어오면서 내 주변에서도 추념하고 싶은 죽음이 있다.
그것도 갯수로 치자면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이다.
“일흔 앞두고 떠난 집안 형님...늘그막에 돌아온 고향, 그는 그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선 집안의 형님 한 분이 가을 추수가 끝날 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0대 중반을 지나 일흔 나이를 앞 둔 분이다. 이 연령대면 이제 본격적인 노인생활에 접어드는 나이이다. 아마 어려서 식민지조국의 해방을 겪었을 테고, 철들 무렵 참혹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쟁과 폭력의 무서움을 맛보았을 그런 연배이다. 이후 근대화과정에 휩쓸려 이농하고, 특별히 운이 좋은 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빈민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어 있을 그런 연배이다.

형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젊어서 도시로 솔가했지만, 상처하고 자식들 뿔뿔이 흩어지고 여기저기 떠돌다 늘그막에 고향에 들어왔다. 고향의 인심도 야박해져 금의환향했을 때 말이지 실패한 인생이 고향을 찾았을 때는 구태여 냉대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환영하는 것도 아니다. 객지를 떠돌면서 먹고 사는데 급급해 자식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출세한 자식도 없고 홀부모를 기꺼이 모시겠다는 자식도 없다. 특별히 자식이 불효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못 배운 자식들이라 자신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게 또한 사실이니 부모봉양은 마음에 있어도 먼 산에 불구경이기 십상이다.

고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몇 날 몇 시에 죽겠다고 공언하고 정확하게 그 시간에 목숨을 끊었으니 주변 사람들이 쯧쯧 독한 사람이라고 안타까워했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 같지는 않다.

형님에 관한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생태주의자로 100세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서 일부 저널리즘으로부터 ‘영웅적 죽음’이라고 불린 스콧 니어링이라는 미국의 생태주의자가 생각났다.

니얼링은 교수, 부자, 저명한 저술가에다가 장가도 젊은 처녀에게 두 번이나 가는 행운(?)까지 누린, 말그대로 세속적인 삶에서 여한이 없는 인생이었지만, 우리 형님은 일찍 상처하고 도시 빈민으로 전전하면서 뼈 빠지게 고생만하다가 목숨을 끊었으니 더 영웅적인 죽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러나 고인이 죽기로 작심하고 목을 매 달던 그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 처지까지 이르게 된 자신의 인생, 남은 자식 등등

문제는 이런 죽음이 한 둘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이런 방식으로 스러져 갔을까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이런 죽음을 예비하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국가’를 원망해야할지, 자신의 ‘팔자’를 한탄해야할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성주 여성농민 오추옥씨, 호남의 젊은 농촌 이장, 강원도 농민, 그리고 농민시위에 갔던 故 전용철씨...”

최근 많은 농민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의 소위 ‘분신정국’이 생각난다. 그때는 주로 학생들이 목숨을 끊었지만 요즘은 농민들이 목숨을 버리고 있다. 농민들이라고 해서 목숨이 두 개인 것도 아니고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대구와 가까운 경북 성주농민회 여성회원인 오추옥 씨가 며칠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바로 그 얼마 전 호남의 젊은 농촌 이장이, 강원도 농민이 그리고 그저께는 농민시위에 참가했던 전용철이라는 젊은 농민이 또 죽었다. (이 젊은 농민의 사인에 대해서는 현재 논란 중이다. 농민회측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죽은 일종의 타살이라는 주장인데, 만약 이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농민과 기층민중에게 유독 가혹하게 대응한 소위 운동권정부라는 참여정부의 대오각성과 대통령의 사과가 반드시 필요한다.)

당장은 우리 쌀 지키기가 급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농촌이 그만큼 살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분들의 뒤를 이어 우리 형님같은 늙은 농민들의 죽음까지 치면 말그대로 ‘죽음의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죽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일이지만 11월 10일 경기도 의왕에서 3학년 초등학교 어린이가 개에게 물려 죽었다.
부모가 이혼하고 외조부모와 함께 실던 이 아이가 아무도 없는 비닐막사에서 개에게 물려 죽을 때의 그 공포와 외로움, 절망감은 생각하기 조차 끔찍한 참상이다. 문제는 이 아이의 죽음이 특별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런 비극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는 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면 겨울 방학을 맞아 해외로 어학연수, 스키여행 떠나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게 우리현실인가)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본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며, 그책임은 우리사회와 공동체 일원인 우리에게도 있다.

최근에는 한국 최대 재벌의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간에 화제이다.
아마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모든 게 갖춰져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이이의 죽음은 또다른 차원에서 충격이다. 어떤 의미에서 실존적인 죽음일 수 있는 이 죽음을 앞에두고 과연 인생은 무엇인가?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학습효과가 있는 죽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학자 정운영 교수...소장도서 2만권에 그는 그때까지 전셋집에 살았다”

지난 가을 잊지 못할 죽음 가운데 하나는 경제학자 정운영 교수의 죽음이다.
나와는 특별한 학연이나 인연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가 ‘현실’을 알고 있는 경제학자라고 생각해(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학자, 논객, 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가 그의 경제관련 저작과 경제비평을 읽고 사숙한 정도이다. 그런데도 서울 모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를 다녀왔다. 그의 죽음을 전후해서 가까운 지인들의 감동적인 조사가 발표되었고, 인터넷언론에서는 고인의 생전 공과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서울대 김수행 교수가 쓴 《정치경제학원론》(한길사. 1988) 머리말에는 특별히 홑따옴표를 치고 ‘인권귀족들’에 밀려 정 교수와 함께 한신대를 쫓겨났다는 표현이 나온다. 묘한 뉘앙스가 있는 표현이다. 내가 관여했던 격월간 <대구사회비평> 시민강연에 첫 강사로 정 교수를 초청했다. 처음 원고청탁을 했더니 자신은 글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 글은 좀 그렇고(아마 원고료가 비싸다는 의미인 듯 했다) 강연을 한번 해 주겠다고 해서 성사된 강연회였다. 많은 분들이 정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당시 모방송사의 100분 토론 사회자였는데 왜 그 자리를 물러났느냐고 여쭸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쫓겨났다. DJ 정부가 들어서자 나가라는 압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인권귀족’이란 표현도 등장했지만 처음 학교에서 쫓겨날 때의 과정과 공방을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野史로 듣고 있던 나는 참 인간관계란 어려운 것이구나, 아니 정치란 참 어려운 것이구나, 아니 진실은 참 알기 어려운 것이구나하는 복잡한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메이저급 보수언론으로 옮겨 간 것, 소위 진보진영의 도덕성을 타매하는 글을 쓴 것 등에(이것 때문에 고인은 사후 일부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대해 이해하는 입장이 되었고,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이면적 진실이란 것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타자를 비판할 때 신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정 교수 사후에 밝혀진 것 가운데 그의 소장도서가 2만 권이라는 사실과 그때까지 전셋집에 살았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었다. 이 두 가지 사실 만으로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의 편에 서고 싶어졌음은 물론이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같다. 각설하고 이제 계절은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상념을 갖게 해주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고, 사회.경제적 죽음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시절이다. 내 가까이 있는 한 노숙자는 올 겨울을 나기가 너무 무섭다고 한다. 이 또한 목숨은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 모든 이들의 죽음이 내년 봄에 파릇한 새싹처럼 다시 부활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죽음일 수 밖에 없다는 절박한 우리현실에 있다. 과연 해법은 없는 것인가?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11월 29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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