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조작사건, 그 후의 대구”

평화뉴스
  • 입력 2005.12.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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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칼럼 4>...
“자신도 모르게 빠져있는 박정희 향수, 그리고 대구의 지식인"


지난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국정원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인혁당.민청학련’ 사건이 정권에 의해 조작.과장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특히, 인혁당 사건 관련 8명의 사형집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가없이는 이뤄질수 없는 점을 들어 박 전 대통령의 책임을 인정했다. 진실이 30년만에 가해기관인 국정원(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고백형태로 규명된 것이다.

인혁당 조작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대구와 연관이 깊다. 그들의 희생은 대구 주류양심세력의 소멸 내지 침잠이란 측면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2.28을 낳은 대구는 4.19이후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61년 5월1일 전국처음으로 노동절행사를 대구에서 갖기도 했다.

5.16이후에도 계속됐다. 63년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후 중앙정보부는 64년 8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의 인혁당사건을 발표한다.
(이 사건은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악용됨에 따라 제1차 인혁당사건이라 불린다)
여기에도 도예종씨 등 대구인사들이 포함돼있다.

72년 10월 유신선포이후73년 10월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유신반대시위가 일어났으며, 대구를 비롯 전국으로 확산됐다. 74년 4월긴급조치4호가 선포돼 민청학련이 범죄단체로 규정되고 그 배후로 인혁당재건위원회(이를 인혁당재건위사건 또는 제2차인혁당사건이라 부른다)가 지목된다.

관련자 23명에게 징역15년에서 사형까지 중형이 선고된다. 75년 4월8일, 사형이 선고된 8명에 대해 대법원은 상고기각결정을 내린다. 다음날인 75년 4월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된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씨 등 8명의 민주양심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들...


김용원씨는 당시 40세(이하 모두 당시 나이)로 경남함양 출신이며 서울대물리학과 졸업후 경기여고 교사였다.
도예종씨는 51세로 경주출신이며 대구대(영남대)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 경제학 강사였다.
서도원씨는 52세로 경남 창녕출신으로 청구대(영남대) 졸업 후 대구매일신문기자.청구대강사를 거쳐 74년 당시에는 침술사였다.
송상진씨는 47세로 대구 동구 백안동 출신이며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후 대구초등교사였다.
여정남씨는 30세로 대구 중구 남일동 출신이며 경북대정외과 입학, 72년 유신반대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됐었다.
우홍선씨는 44세로 육군대위예편 64년 제1차인혁당때 구속됐었다.
이수병씨는 39세로 경남의령출신이며 부산사범 경희대졸업 삼락일어학원 강사였다.
하재완씨는 43세로 경남 창녕출신이며 단국대졸업 양조장을 경영하기도 했고 74년에는 건축업을 했다.

이처럼 이들 대부분은 향토 대구 또는 경북 또는 대구 인근 경남출신이며 향토 영남대(옛 대구대.청구대) 또는 경북대를 졸업 또는 수학하고, 대학강사 초등교사 학원강사 양조장 건축업에 종사한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고 장기집권 유신을 반대하는 양심세력이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은 아닌 것이다.

같은 향토출신의 박정희 정권은 왜 이들을 죽였나.
향토출신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는 등 당근정책을 구사하면서도 이들 향토출신에게 인혁당이란 틀을 덮어씌어 죽였을까. 향토에는 장기집권을 저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작용한 것인가. 또 전국적 거물급 대신 향토의 평범한 양심세력, 그래서 잘 모르는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다른 지역의 유신반대시위나 운동도 잠재우려 한 게 아닌가.

인혁당조작사건은 대구 민주양심세력에 대한 선택적 고엽제 살포였다.
이 고엽제는 민주양심세력만 선택해 고사시킨다. 그후 대구는 대학생을 제외한 양심세력들이 기를 펴지 못하게 됐다. 처자식이 있는 이들은 까딱하다가는 제3 제4의 인혁당에 몰려 하루아침에 참살당하는 꼴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이후 의기를 접거나 동조하거나 외면하는 양상으로 변해버렸다. 반면 ‘정권창출’ 지역답게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박정권의 뜻대로 인혁당에 관련된 그들은 그렇게 유언도 없이 사형을 당했고 유족은 그날이후 ‘빨갱이’의 아내 및 아들 딸이 되어 온갖 고통을 겪어야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했다.

인혁당사건! 대구에 살면서도 대구사람들은 이 사건을 잘 모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박정희 향수’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있는 한 ‘너만 모르고’ 세월은 흘러간다. 박정권은 조작한데 비해 너무 짧게도 5년뒤인 79년 10월 무너졌지만 그가 뭉게버린 밭은 그후에도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구의 지식인들이 민주양심세력이 되어 (‘북한의 지령을 받지 않고’) 지난 60년대, 70년대 의기를 되찾을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영남대민주동문회 ‘4.9특별위원회’가 주축이돼 영남대 안에 ‘인혁당 추모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지난 11월부터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는 점은 매우 반길 일이다. 대구 민주양심 회복의 거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유영철(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유영철 전 편집국장은, 1978년 영남일보에 입사해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8년동안 매일신문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복간된 영남일보로 돌아와 사회부장과 편집부국장 등을 거쳐 2005년 5월까지 편집국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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