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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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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시사칼럼 64]...
"봄 햇살에 담긴 비극의 역사를 나누고 싶다"

필자는 76학번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06학번 신입생들에게는 30년 선배인 셈이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돌아보니 꽤 긴 세월이 흘렀다. 지난날을 돌아보기보다는 앞으로 올 날에 더 관심이 많은 필자지만, 오늘은 옛날얘기를 좀 하고 싶다. 4월 3일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58년 전 오늘 얘기부터 해보자.
그 때는 필자가 세상에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어느 선생님이라도 가르쳐 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서 만난 어느 역사 선생님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책을 보고 혼자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4.3 제주항쟁 사건이 그것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의 비극"

3만 명 가까이 되는 도민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1/9이 학살당했던 것이다.
그것도 빨갱이란 누명을 쓰고. 살아남은 제주도민 가운데도 가족과 친지를 잃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가족이 몰살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한(恨)이 섬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 사건을 책으로 접했던 학창 시절, 필자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수도 없이 땅을 쳤고,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안으로 삼켜야 했다.

1999년 12월에 4.3특별법이 제정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듬해에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4.3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2003년 10월에는 4.3 진상규명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통령이 직접 당시 국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다행히 유족들도 묵은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어느 희생자와도 개인적 인연을 갖고 있지 않지만, 뜨거운 감격에 한참을 들떠 있었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를 청산하고 광명의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감격이었다. 4.3사건을 알게 됐던 젊은 시절의 충격과 분노가 컸던 만큼, 대통령이 직접 국가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필자의 감격은 무척이나 뜨거웠고 또 의미심장했다.

제주의 비극으로부터 다시 26년이 흐른 뒤, 그러니까 1974년 4월 3일도 비극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때는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나라가 뒤숭숭하고 동네의 대학가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은 알았지만, 세세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그 날 민청학련사건이 있었고 그를 빌미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다는 사실이다. 유신헌법의 개정 논의조차 금지한 긴급조치 1호(1974년 1월)에 이어, 긴급조치 4호는 조작된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를 비상 군법회의에서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한 역시 야만적인 조치였다.


"1974년 4월 3일, 그리고 1975년 4월..."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75년 4월 8일, 이번에는 그 대학생들을 조종해 인민혁명을 꾀했다는 죄를 뒤집어쓴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 관계자 8명이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에 그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 가운데 4명이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이었다. 그 사건도 지난 해 사법부의 재심 대상 사건으로 결정되었고, 이번 주에는 대구에서도 각종 추모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세계가 분노한 사법살인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의 한(恨)이 이제야 만분의 일이라도 씻겨질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다.

긴급조치 1호, 4호가 발동된 지 2년 뒤, 그리고 인혁당 조작사건이 있은 그 이듬해에 대학에 입학한 필자의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암흑이었다. 우선 캠퍼스는 학문을 연마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캠퍼스가 아니었다. 낭만이 숨쉴 곳이라곤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캠퍼스에는 정보요원들이 넘쳐났고 자유는 이미 질식해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들도 당시 독재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선배와 동료학생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는 모습도 지켜봐야 했다.

감옥갈 고비는 필자에게도 숱하게 밀어닥쳤다.
필자의 대학생활은 분노와 탄식, 바로 그것이었다. 캠퍼스 밖의 야만은 더했다. 자유언론을 주장하던 기자들은 펜을 뺏긴 채 거리로 내몰렸고, 언론은 독재권력의 방패막이로 전락했다. 노동자들은 군화발에 치이고 심지어는 인분통을 뒤집어써야 했다.


"부러운 06학번 신입생...4월 캠퍼스의 역사를 아는가"

필자가 그런 대학생활을 시작한지 어느덧 30년이 흐른 것이다.
비극의 4월 3일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4월 3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06학번 신입생들은 4월 캠퍼스의 봄을 만끽하고 있다. 각자의 관심과 취향대로 낭만을 즐기며 꿈을 설계하고 있다. 발걸음도 가볍고 표정도 구김 하나 없이 밝다. 캠퍼스를 환하게 물들인 벚꽃, 개나리꽃, 목련꽃보다도 더 아름답다. 갑자기 그들이 한없이 부러워진다. 넘쳐나는 자유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저 06학번 새내기들이 너무도 부러워진다.

필자에게 저런 대학생활이 다시 한번 주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괜한 미련에 빠져 본다.
배낭 메고 외국여행도 맘껏 다녀보고, 취미생활도 원 없이 해보고, 학문과 토론에도 실컷 심취해 볼 수 있는 그런 대학생활을 다시 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에 잠시 젖어 본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곧바로 마음을 추스른다. 그리고는, 한층 밝아진 후배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선배 세대의 보람 아니겠는가 하고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오늘은 모처럼 학생들과 마주앉아 옛날과 오늘과 내일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그들이 지금 즐기고 있는 이 귀한 낭만과 자유가 있기까지 저 질곡의 역사를. 선배들이 헤쳐 온 그 인고(忍苦)의 날들을. 또 그들은 후배들에게 무엇을 넘겨 줄 것인지를. 다시는 그런 야만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늘의 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오늘은 학생들과 마주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나눠 봐야겠다. 2006년 4월 3일의 화창한 봄 햇살에 담긴 뜨겁고 가슴 벅찬 역사적 의미를 함께 이야기 해봐야겠다.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 홍덕률 교수는, 대구대학교 <시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대구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구재단에 의해 해직(1993)됐다가 임시이사 파견 뒤 1년 만에 복직되기도 했습니다. <대구사회연구소> 부소장과 <대구경북분권혁신아카데미> 부원장, [교육인적자원부 정책자문위원],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분권과 혁신’을 위해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또, 대구KBS <화요진단>과 영남일보를 비롯해 신문과 방송에서 시사칼럼을 쓰거나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홍덕률의 시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6년 4월 3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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