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대구사회에 그런 게 거의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는 일종의 지식인 커뮤니티 같은 게 있었다. 주로 영남대 문과대 몇몇 교수들을 중심으로 타 대학의 일종의 진보적인 교수, 재야운동가, 문화인들의 모임이었다. 뚜렷한 명칭을 달고 조직적인 어떤 일을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국관련 서명할 일이 있으면 사발통문을 돌려 서명을 하고 함께 모여 저녁 식사에 이어 간단한 술자리를 갖는 정도였다.
알려진 것처럼 80년대는 폭력적인군사정권 아래서 억압받다가 보니까 아무래도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료의식, 공동체의식 같은 게 강하게 남아 있어서 뜻이 같은 사람끼리 자주 모였던 것 같다.
이런 자리에서는 당연히 정치시국문제, 역사나 문화, 현실사회문제에 대한 지성적이고 높은 수준의 담론이 오고 가서 곁에서 듣는 재미가 컸다. 나도 가끔씩 이런 저런 자리 말석에 끼여 앉아서 좌중담소를 엿듣곤 했는데 그 때 받았던 지적 충격이나 현실에 대한 개안(開眼)은 나 개인이게는 큰 감동과 공부였고 오랫동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 때의 주요 멤버들은 고인이 되기도 하고, 대구를 떠나기도 해서 다시는 그런 지성적 아우라(Aura)를 풍기는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물론 대구에 남아있는 후배들이 그런 지성적이고 문화적인 공동의 장을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뚜렷한 구심이 없고, 공부 수준 또한 당시 멤버들을 따라갈 만큼 당대를 아우르는 긴장감도 없고, 아울러 시대 차체가 워낙 개인 플레이로 가는 추세라 다시는 그런 지적 공간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각설하고 당시 풍경하나.
“큰 학자를 알아 보지 못한 재야운동가”...
당시에는 가령 김지하나 김남주 같은 감옥에서 고생하고 나온 문인들이 있으면 이 커뮤니티에서 대구로 불러 강연을 듣고 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봉화에서 전우익 선생, 창녕에서 조성국 선생(영산줄다리기 기능보유자) 같은 분이 대구에 나오시면 이와 같은 자리가 이따금 벌어졌다. 한 번은 갓 감옥에서 나온 재야운동가를 한 사람 불렀다. 이름을 대면 곧바로 알만한 사람이다. 80년대 소위 시중에서 불리는 운동권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데 현재도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고 감옥에서 나오자 격려하는 차원에서 대구에 모셨다.
예의 일군의 교수들과 그가 식당에서 저녁식사와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돌아가면서 서로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는 차례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역사학자 정석종 교수를 소개했다. 정 선생은 조선후기사회사에 뛰어난 업적을 보인 학자이면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쓴 대하소설 <장길산>에 자료 제공자로 알려진 큰 학자였다.
돌아가면서 인사를 마친 후 식사와 방담이 오갔다. 와중에 그 유명 재야운동가가 정석종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성함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너그럽게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가끔씩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릴 때가 있으니.
“나라를 일신(日新)하고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은 좀 달라야 한다”
그런데 모임에 참석했던 교수 한 분이 이를 두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운동권 말석의 어린아이도 아니고 명색이 국사(國事)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혁명에 뛰어든 재야운동가 그것도 지도자가, 정 교수의 이름을 몰라 다시 묻는 추태를 벌이고 있다는 게 그 교수의 비판 요지였다. 다시 말하면 나름대로 큰 학자인 정 아무개 교수도 제대로 몰라 이름을 다시 묻는 정도의 교양을 가지고 있는 작자가 무슨 나랏일을 하겠다고 난리냐 하는 질책인 것이었다.
나는 이 비판에 공감했다.
물론 어떤 뛰어난 인간도 세상 모든 일에 정통하고 박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 같은 소인은 자신 전공조차 제대로 못하고 급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많은 평범한 이들은 자신의 전공조차 제대로 못 챙기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를 일신(日新)하고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은 좀 달라야 한다는 게 그 비판의 요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현재 그 재야운동가 3인방 중 한 명은 여권의 대권 후보로 부쩍 성장했고, 또 한 명 역시 중견정치인으로 컸으나 문제의 그 분만은 정치인으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고 고전하고 있는 것 같다.
(오해는 피하자. 물론 상대적으로 정치인으로 성공한 두 재야운동가가 그 분보다 반드시 교양이 높다고 확인하지 못했고, 현재 불우한 처지에 있는 이 운동가 역시 문화적 교양의 빈곤(?)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빠졌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梧葉一聲에 知天下之秋'라는, 오동잎 소리에 천하에 가을이 든 것을 안다는 옛말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봐야만 반드시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인혁당 추모공연 중간에 자리를 뜬 여당 대표”...
지난 4월 9일 대구시내 2. 28 기념 중앙공원에서 인혁당 3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어느 해보다 내실 있게 치러진 것 같다. 당일 비교적 않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는데 의식 진행 중 여당 대표가 급한 일정 때문인지 중간에 자리를 뜨자, 수행원을 비롯한 많은 관계자가 우르르 몰리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 순간은 단상 위에서는 추모음악을 공연하고 있었다.
특히 정숙해야할 음악공연은 당연히 김이 새고 우스운 꼴이 되었다. 집권여당의 대표쯤 되니 항상 바쁜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필이면 문화공연 때 자리를 떠 엄숙해야할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무교양과 배려의 부족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또 추모제 뒷부분에 배치된 1시간짜리 문화공연 시간에는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빠져나가 관객석은 마치 소 뜯어먹은 머리 모양 군데군데 뻐끔해서 영 초라하고 썰렁했다. 전체적인 추모제의 성격상 전혀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니지만 순간 어떤 모욕적인 기분을 느꼈다. 문화란 언제나 행사들러리 역할 밖에 못하는가? 이럴 바엔 근엄한 의식만 하지 문화는 왜 곁다리로 끼워 넣는단 말인가 하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고립된 도시,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시아 작가를 포용한 광주”
80년대 후반에 ‘영호남시인대회’라는 것을 처음 개최했다.
영호남 시인들이 한 번은 광주에, 다음은 부산에, 다음은 전주에, 그 다음은 대구에 서로 모여 우애를 다지고 현실과 문학에 대해 모색하는 그런 지리였다. 십 수년을 개최하다가 근래에는 전국민족문학인대회라는 이름으로 확대해서 전국적인 모임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대회가 처음 열린 그 이면에는 당시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고립(?)돼 있던 광주의 친구들이 우리 영남을 향해 흔든 일종의 절박한 구원의 손짓과 같은 성격이 짙었다. 우리는 당연히 호응했고, 이들과 함께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억압적인 군사정권에 저항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우리사회도 어느 정도 절차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게 사실이다.
지난 겨울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 조성 축제(2005. 12. 1-27)가 광주에서 열렸다. 그 행사 가운데 하나로 광주에서 '아시아문학포럼'이 열렸다. (사)아시아문화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주최, 광주전남작가회의와 조선대 인문대가 주관하고, 문화중심도시조성위원회와 문광부가 후원하는 행사였다. 이 대회에는 국내 문인 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레바논, 터키, 필리핀, 팔레스타인, 베트남, 몽골 등 아시아 각 국의 문인들이 대거 참가했다. 대회의 슬로건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아시아 작가의 연대'였다. 이것은 전쟁과 빈곤, 폭력 그리고 비민주적인 정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아시아민중과 작가들에게 대한민국의 광주가, 광주의 문학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인 것이다.
그 큰 대회에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시인도 시 낭송자로 초청 받아 참가했는데, 아마 어려운 시절 광주를 많이 찾아준 것에 대한 보답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날 관객석에 앉아 많은 것을 생각했다. 80년대 후반 국내영남 쪽 문인들에게 구원의 손짓을 보내던 이들이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느새 아시아의 작가들에게 손을 내 밀어 그들을 포용할 정도로 커지고 국제화되었다.
“대구는?...문화관련 정책이나 공약 하나 없는 지방선거 후보들”
그런데 대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내실 있는 행사하나 못하고, 민주주의나 평화, 생명·생태 같은 당대의 주요 의제를 문학적으로 설정해내는 일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문인단체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시비(詩碑)를 많이 세웠니, 지하철역 벽면을 개인 시로 도배했니 어쨌니 하는 말 그대로 비문학적이고도 질 낮은 논박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건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지역의 문학인들의 공동책임이라는 사실을 자책하면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5·31지방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출마자들이 분주해졌다.
대구시장 및 각 자치단체장, 기초·광역의회 예비후보들의 대진표가 짜였다. 신문지면이나 방송의 토론과정에서 이 분들의 정책과 비전을 엿볼 수 있다. 나름대로 고심은 했겠지만 급조한 정책과 공약이라는 의혹은 여전해 보인다.
나같이 '문화' 주특기자가 보기에는 문화관련 정책이나 공약이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있다고 해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출마자들의 문화예술정책이 없거나 빈곤한 것은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책임이 크다.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정책으로 강제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칼라풀 대구? 콘텐츠 없는 빈 외침에 불과”...
먹고사는 문제가 워낙 위중하니 차마 관심이 거기까지는 닿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GRDP(지역총생산)이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십 수 년째 꼴찌일 정도로 지표 상으로나 실제 피부로 체감하는 지역 경제가 모두 엉망이니, 사실 후보자와 유권자 모두에게 경제 이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을 만도 하다. 칼라풀 대구라고 외치고는 있으나 콘텐츠 없는 빈 외침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문화는 먹고사는 문제의 근원을 생각해주는 힘이다. 사실 실존의 물질적인 토대가 되는 경제문제는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창의적이고 본질적인 문화의 구현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제도 있기 어렵다. 단지 부른 배에 만족하는 '돼지인간'만 있을 뿐이다. 문화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 없는 한 어떤 개발이나 성장도 공허할 뿐이다.
5·31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정책을 지켜보면서 문화 판에서 실행되는 구체적인 형태의 문화이든 아니면 정치판에서 정책으로 제시되는 문화이든 '대구문화'에 대해 좀더 근원적이고 획기적인 생각을 갖게 할만한 계기는 없는 것인지 무력감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김용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시인. [대구사회비평] 발행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자치소리를 듣고 싶다>,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지금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을 맡아 시인과 문학평론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참여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계간 <대구사회비평>을 펴내고 있습니다. 또,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CBS대구방송]의 <라디오 세상읽기>도 매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6년 5월 1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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