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신문 안>
"평화뉴스 들풀 유지웅. 그에게 청춘을 묻다"(06.05)

평화뉴스
  • 입력 2006.06.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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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뉴스 들풀 유지웅.
그에게 청춘을 묻다

매주 들풀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짧지만 똑 소리 나는 소년처럼 고집 있고, 어른처럼 침착하며, 세월처럼 단호하면서도 꿈처럼 용감한 편지다. 대구 경북지역 인터넷 신문 <평화뉴스>의 편집장 유지웅. 그의 들풀 편지를 맨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루쉰의 산문 시집인 <야초>가 생각났다. 중국 혁명전쟁이라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비타협적 투쟁을 견지해온 그의 고민과 폭로의 기록이 담긴 글. 평화뉴스 유지웅의 들풀 편지는, 2006년의 <야초>다.



평화뉴스는 2004년 창간된 대구 경북 지역의 인터넷 신문이다. 평화와 통일, 나눔과 섬김, 지역 공동체에 가치를 두고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안을 중점적으로, 또한 기존 언론에 대해 메스를 댄, 한마디로 용감무쌍한 대안매체다. 그러다 보니 평화뉴스를 아끼는 사람들 만큼이나 적도 많고 말도 많다. 8년 간 방송사 기자로 재직했던 그가 심신 편안한 직장을 그만두고 평화뉴스를 만든 건 왤까. 그를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든 생각, 유지웅,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봤길래?

“달동네 아세요? 대구에도 있다는 거? 대현동 감나무골이 대구의 달동네에요. 우리 집 바로 뒤쪽 동네에요.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전태일이 시작했고 빈민운동은 천주교에서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빈민운동이라 했는데 요즘은 주민운동이라고 해요. 종교가 카톨릭이라 어려서부터 그런 활동들을 많이 접했는데, 대학 때 활동하면서 알게됐죠. 달동네에서 공부방, 어린이집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고생 많이 했죠.... 2학년 군대 가기 전에 많이 고민했었어요. 민중이 뭐지? 라는 것. 20대 중반에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에요. 달동네에서의 경험은.
그러다 보니 전공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맨날 데모해야지, 학보사 취재해야지.. 법대 다녔는데, 사실, 딱 한번 미치게 해본 공부가 악법에 대한 거였어요. 악법하나 만큼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지금은 거의 바뀌었지만.”

티비에서 보던 달동네는 그저 티비속의 동네였다. 보고, 알고 있으나 체화되지 못해 딴나라 이야기처럼 막연한. 그의 20대는 달동네 사람들과 함께였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2년간 꾸준히 이어온 평화뉴스를 들여다보며 벌판에 서서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이 사람 참 외롭겠구나했던 마음이 왜였는지 어렴풋하다. 열심히 데모했고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민중에 대해 고민했다. 보여 지는 것에 대해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일단은 건강한 것이다. 그는 건강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 그가 지금 학생들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요즘 아이들은 참하고, 건강합니다. 물론, 답답하죠. 자기밖에 모르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없고...무엇보다 사회의식, 민족, 전체의식이 예전과 다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이들에게 굳이 강요할 필요 없고 그들이 그래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보여 지는 현상대로 시대는 따라가기 마련이니까요. 민족의식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 나름대로 개성을 가지고 만들어 내고 있어요. 또 하나의 문화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애들 문화를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뿐이지, 우리 때 어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과 똑같은 흐름이에요. 예전에는 정치, 사회, 민족, 노동의 가치까지도, 크게 보면 사회 민족의식을 많이 강조했다면 지금 세대는 그것을 강요하거나 강조할만한 여건들이 안됩니다.
그때 학생운동 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집권자들이에요. 그때 했던 요구들을 지금 다 풀어내고 있는 것이죠. 잘 못한다 뿐이지. 화두가 예전과 달라졌어요. 10년 전에는 개성이 문화의 흐름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된 것이죠. 단지, 관심 좀 가져라 하고 싶을 뿐. 그런데 나라가 발전할수록 정치 사회에 대해 무관심해지는데,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에요. 그럼 지금 나라가 많이 발전한 거네. ^^

최근 80년대 90년대 초까지의 화두가 지금은 관련이 없고, 또 학생들이 꼭 관심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생각해요. 정치 세력이 바뀌었고, 권력자가 바뀌었고 시민사회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때는 학생들 아니면 할 이야기도 해줄 데도 없었지만, 지금은 대구에 시민사회단체만 해도, 아무리 작게 잡아도 30-40개쯤 되잖아요.

오히려 아이들이 부러워요. 세상에 대해 고민 안하고, 서예나 바둑 하면서, 한량처럼 놀고 싶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놀지 못했어요. 정치가 바뀌고 집권자들이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게 되면, 빠르면 한 10년 후의 대학생들은 전부 저 하고 싶은 것들, 저 하고 싶은 공부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저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해도, 자기 공부를 좀 하고 그러면 좋겠는데, 전부 영어만 붙잡고 있으니까, 문제는 문제죠.”




데모, 학생운동. 나 같은 어중간한 90년 세대에게 그런 단어는 묘한 낭만의 울림을 가진다. 그의 청춘 속에 낭만은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그의 세대들도 그들의 낭만이 있었을 텐데.


“그런 행적들이 문학에 많이 나오죠. 과거를 내세워 글을 쓸 때, 불필요한 사회적 프라이드가 주도되는 게 많은 것 같고. 그때는 너무 괴로웠죠.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학생운동도 그렇고, 92년도에 문민정부가 들어오면서 학생 운동의 주요방향들이 흐려지고 헷갈리게 되면서 더 그랬고. 문화에 대해서도 너무 힘들고 괴롭고... 그때의 낭만이었죠...
대학다닐 때 부러웠던, 요즘 같은 현상은 “저런 양아치들...” 했지만, 지금은 달라졌죠. 모든게. 지금의 학생들, 나름대로 얼마나 낭만이 많은데요. 연애, 얼짱 몸짱이니, 어떻게 보면 말초적인 것이지만, 저거끼리의 낭만이죠.”

최소 인원에 최저임금으로 엮어내고 있는 요즘의 쉴 새 없는 나날. 지난해 추석 무렵 처음 일요일 하루를 쉬었더니 독자 한 분이 질타를 하더라는 그의 말끝에 서운함과 동시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올해 2006년은 평화뉴스가 도약하느냐, 아니면 좌초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한다. 재정적 독립을 이뤄내고 독자들의 잔인한 평가를 받겠다는 각오다. 치열했던 20대, 저거끼리의, 낭만을 가슴에 품고, 지금 30대의 하루 하루를 똑같은 치열함으로 살고 있는 청년 유지웅. 그는 여전히 벌판에 선 스무살이다.

신문이나 티비에 나가니까 동네 아줌마들이 알아봐요.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가면 아줌마들이 한마디씩들 하세요.
“아이고 신랑, 거, 테레비에 나오데. 아이고 자기하고 싶은 일 하니까 얼마나 좋노, 그게 젤
좋지. 근데 돈이 안되가 우짜노..”

돈 안되는 아침 출근길, 신천교를 건너 사무실로 가는 그의 발걸음 뒤로 감나무 골 좁은 골목이 빼곡이 들어섰고, 저만치 앞엔 <평화뉴스> 간판이 바람에 흔들린다. 똥물 신천, 젊디 젊은 시절부터 그 다리를 지났겠지만, 지금, 적어도 똥물이라는 선행어를 지운 신천을 건너는 그의 발걸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 같다. 평화뉴스의 들풀, 청년 유지웅. 그를 만나고 나는 또 한 뼘 큰다.

(archigoom@culture-an.co.kr)

* 대구에서 매월 발행되는 <문화신문 안> 2006년 5월호에 실린 류혜숙 편집장의 글입니다.
<문화신문 안>의 모든 글은 인터넷 카페 http://cafe.naver.com/cyberan.cafe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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