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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주체는 겸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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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시사칼럼 66]...
“감동이 없는 개혁, 국민의 ‘개혁 피로증’만 부른다”


흔히 개혁 피로증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5.31 지방선거 뒤에도 7.26 국회의원 재.보선 뒤에도 그랬다. 두 차례의 선거 결과를 ‘개혁의 패배’로 해석하면서 이제 유권자에게 인정받으려면 개혁을 포기하라고 다그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선거가 늘 그러지 못해 왔고 그래서 선거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가져다주지 못해온 것이 우리네 정치사였지만, 그렇더라도 그 선거들은 우리 정치인과 유권자에게 금싸라기 같은 교훈을 줘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만큼은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를 통해 우리의 정치가 한걸음씩이라도 전진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선거 못지않게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에서마저도 정략과 비이성적인 아전인수로 넘쳐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흔히 개혁.진보의 실패, 개혁정권의 패배로 읽히고 있는 최근 두 차례 선거에서, 우리가 진정 읽어내야 할 유권자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특히 ‘개혁’을 표방해온 정치집단과 사회집단들이 새겨서 고민해야 할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개혁은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고통을 함께 하는 ‘따뜻한 개혁’이 필요하다“

‘개혁 피로증’을 초래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보다도 국민이 개혁의 성과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개혁의 성과를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개혁의 역사적 대의에 이성적으로 공감하더라도 개혁의 열매가 손에 쥐어지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자격없는 일부 사람들이 독점하게 되면, 대중은 당연히 개혁에의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대중의 지지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개혁의 성과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세심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으로써 개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개혁에 대한 대중의 도덕적 지지 + 개혁의 성과에의 기대>에서 <개혁에 대한 대중의 도덕적 지지 + 실리에 기반한 지지>로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개혁의 성과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필자는 국민이 느끼는 ‘개혁 피로증’이 단지 개혁 성과의 미비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감동의 결여’인 것이다. ‘성과가 적은 개혁’ 때문보다는 ‘감동이 없는 개혁’으로 인해 국민은 더 피곤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그간의 개혁은 소리만 요란했지 대중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국민이 소위 ‘개혁 정책들’에 대해서 실망하고 냉소하기까지 하는 것은, 대부분 감동의 결여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동이 있는 개혁’은 어떻게 가능할까?

첫째, 개혁이 감동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따뜻해야 한다.
‘따뜻한 개혁’. 그것은 무엇인가? 요체는 개혁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과 문화로부터 고통받아온 사람들에 대한 무한대의 염려와 사랑이 개혁의 시작이자 끝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개혁은 종종 사람을 고통스럽게도 한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과 문화로부터 부당한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개혁을 통해 부당한 질곡과 고통에서 해방될 사람들에게도 일시적으로나마 아픔과 고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뜻한 개혁은 일시적으로 아픔과 혼돈을 겪거나 손해를 보게 되는 이들은 물론 기득권을 놓아야 할 사람들까지도 깊이 염려하고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모두를 편안하게 해줄 방안까지는 없더라도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한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은 설령 고통을 수반하는 개혁이더라도, 기꺼이 참여하고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늘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세’로 개혁을 설명하고 전파해야”

둘째, 개혁이 따뜻할 수 있으려면 소위 개혁의 주체들이 겸손하지 않으면 안된다.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개혁을 추진하는 주체가 겸손하지 못하면, 그 고통은 분열과 적대를 낳기 십상이다. 겸손한 개혁 주체는 역사적 개혁 과업을 자신을 높이는 기회로 삼지 않는다. 자신만이 개혁의 주체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개혁의 성과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늘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세로 개혁을 설명하고 전파한다. 개혁 프로그램에 의해서 자칫 고통받게 되는 대중 자신들보다 그들의 고통을 더 아파한다. 겸손한 자세로 개혁 정책에 임하지 않으면 개혁의 과정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개혁을 핍박과 억압과 고통으로 여기게 되고, 그래서는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

셋째, 개혁 주체들은 따뜻하고 겸손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개혁은 원래 누구에게나 피곤한 것이기에, 웬만한 도덕적 자격을 갖추지 않고서는 대중에게 개혁을 요구할 수도, 대중을 개혁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낼 수가 없다. 개혁을 이야기하고 개혁을 추진하며 대중에게까지 개혁을 요구할 수 있으려면, 개혁 주체들은 대중들보다 수십 배의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에 기초한, 겸손하고 도덕적인 주체에 의해 추진되는 따뜻한 개혁이지 않으면 그 개혁은 감동을 줄 수 없다. 감동이 결여된 개혁은 날카로운 칼일 수밖에 없다. 감동이 있는 따뜻한 개혁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ㆍ보선의 결과는 ‘감동이 결여된 개혁.진보의 패배’, ‘차가운 개혁에 대한 심판’이라고 봐야 한다. ‘차가운 개혁, 겸손하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개혁에는 감동이 따를 수 없고, 감동이 없는 개혁은 지속될 수도 따라서 성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다. ‘개혁을 폐기하기보다는 개혁에 감동을 불어넣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선의 결과가 던져준 국민의 메시지인 것이다.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 홍덕률 교수는, <대구경북 분권혁신아카데미> 원장과 <대구사회연구소> 부소장, 대구대학교 <시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홍덕률의 시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6년 8월 7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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