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실험 관련한 논란 속에서 나처럼 순진한 백성들은 논리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왜 미국은 천 번이 넘는 핵실험을 했고 만 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그 누구도 미국의 핵무기를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북한의 핵무장을 비난하려면 미국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타 핵보유국들의 핵도 함께 폐기하라고 소리쳐야 앞뒤가 맞는 것 아닌가.
이처럼 순진한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면 흔히 북한은 불량국가라서 대량살상무기를 허용할 수 없다는 핀잔을 듣는다.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면 왜 안 되고 미국이 첨단무기들을 강매하는 것은 왜 묵인되는지 따져도 북한은 깡패국가라서 안 된다는 힐난을 듣는다. 하지만 그런 답을 듣는다고 시원스럽게 납득하지는 못하겠다.
부시의 미국은 무고한 수십만 이라크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대량살상무기를 이라크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허구였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사회의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강경파들은 전범으로 처벌되기는커녕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더 불량스러운 깡패집단을 지구상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북한의 입장이 아니라 냉정한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일단 부시정부의 눈 밖에 나기만 하면,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여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핵무장을 하지 못하면, 이라크 꼴 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근거 있다.
"북한에 퍼준 혈세가 핵무기로 돌아왔다는 비난은 정략적 선동의 산물"
물론 북한 핵실험이 잘 된 일이라고 박수치자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파국의 위협은 늘었다.
그렇다고 북한에 퍼준 국민의 혈세가 핵무기로 돌아왔다는 비난은 정략적 선동의 산물이다.
북한은 주민들이 더 굶주리더라도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하면 만들었을 것이다.
만들 필요가 없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금도 북한이 핵을 폐기할 수 있도록 하는 대내외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최상의 해법이다.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은 그런 조건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 핵실험이라는 현재의 결과만으로 정책의 성패를 간단히 판정할 일은 아니다. 어떤 정책도 완전한 성공 또는 실패는 없다. 햇볕정책과 핵실험의 직접적 인과관계에 대한 비난성 억측은 난무하지만 객관적 입증은 전무하다.
서해교전 당시 국민의 정부는 들끓는 여론과 전쟁 한 판 하자는 호전적 분위기에 동요하지 않고 햇볕정책을 유지했다. 그 효과는 다양한 교류를 통해 국민들의 정서에 깊숙이 새겨졌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규모의 냉전비용을 절감시킨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성과를 깎아내리면서 당장 폐기처분하자고 주장하는 데에는, 냉철한 국익계산보다 참여정부에 대한 적개심과 정파적 이기주의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북한의 핵실험이 당장 남북의 전쟁 상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 사재기나 해외도피의 행렬이 없다는 점만으로도 그 성과는 무시할 수 없다.
핵실험 상황은 서해교전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하다.
참여정부는 핵실험을 막는 데에 실패했다. 전 세계의 경찰노릇을 해온 미국도, 북한의 혈맹 중국도, 동아시아의 경제강국 일본도 원하지 않았지만 핵실험은 예고되고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에는 이, 핵에는 핵으로 맞서야 할까. 북한의 핵무장을 해제하거나 응징하기 위해 우리도 핵무기를 사들여오거나 만들어야 할까. 여차하면 모든 것을 걸고 한판 벌여야 할까. 그리하여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참상을 자초해야 할까.
"이 땅의 절대목표는 '평화 유지'...냉전의 회귀를 염원하는 막무가내 요구들까지 포용해선 안돼"
북한 핵실험 이후 이제 미국밖에 믿을 데가 없다는 말까지 이른바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에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미국은 이미 1994년 문민정부를 따돌린 채 북한을 상대로 냉혹하게 전쟁 수순을 밟아갔다. 천문학적 재산피해와 수백만의 인명 피해를 계산에 넣었었다. 더욱이 그러한 전쟁결정은 부시처럼 호전적이지도 않은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 시절의 일이었다. 미국도 까다로운 동맹 상대이지 결코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구세주가 아니다.
한반도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주체 내지 일차당사자는 남과 북의 국민들이다.
아직 우리의 손을 떠난 부분보다 우리의 노력에 달려 있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 다수 국민들이 냉전주의의 망령에 홀려 이성적 판단을 홀대할 때, 정책결정자들이 냉전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정책의 일관성을 버리고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요구들에 끌려 다니느라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조차 미뤄놓거나 잘 하던 일마저 그르칠 때, 진짜 후폭풍의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참여정부는 좀 더 주체적일 필요가 있다.
지지율이 낮다고 해서 스스로 옳다고 판단하는 정책마저 추진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국민들에 대한 죄악이다.
이제 정치적으로 더 잃을 것이 무엇인가. 냉전의 회귀를 염원하는 안팎의 막무가내 요구들까지 포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과 주변국들에게도 주문해야 할 것은 확실히 주문하길 바란다.
북 핵실험 저지가 아니라, 이 땅의 평화유지가 절대 목표이며, 평화유지비용의 절감이 그 다음 과제다.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의 성과를 뛰어넘을 획기적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여정부의 좀 더 당당하고 단호한 대응을 기대한다.
[홍승용 칼럼 28]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6년 10월 16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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