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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그놈'과 절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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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패거리 내부 대화는 독백일 뿐, 대립하는 사이의 대화가 진짜 필요하다"

월요일은 ‘주몽’ 보는 날이다.
기말고사를 코앞에 둔 아들 녀석도 한사코 보겠다고 끼어든다.
확실히 재미는 있다. 우여곡절 속에서 쌓여가는 주몽의 성공사례들이 재미의 원천일 것이다.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만 아니라 그와 맞서는 대소와 그 주변의 주요 인물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정당성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갈등을 빚어낸다는 점 또한 재미의 본질일 듯하다.

대소와 황후에게 우리의 주인공 주몽은 언제나 ‘그놈’일 뿐이다.
주몽이 성공을 거두어갈수록 대소와 황후에게는 반역의 죄목들과 위협요인들이 늘어나는 것으로만 보인다. 그들을 얽어매놓고 있는 권력구조를 감안하면 이를 그저 피해망상의 산물이라고 여기기도 어렵다. 오히려 자신의 절대적 타당성을 주장하려드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소와 황후의 시선, 즉 우리의 주인공이 이루어내는 훌륭한 일들을 괘씸한 역적질로 보는 시선은 유사 이래 사회적 갈등구조와 늘 공생해 왔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마이너스 셈법은 오늘날에도 인류사회에서 예외 현상이 아니다.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무장투쟁은 반인륜적 테러이기도 하며,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몸부림은 가차없이 불법으로 재단되곤 한다.

그 반대의 논리도 성립된다.
테러세력을 근절하겠다고 전쟁을 벌이는 자들은 제3세계 민중들이 보면 무자비한 제국주의 침략자들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단죄하는 공권력은 노동자들의 눈에 비인간적 자본가들의 하수인이다. 대소의 눈에 주몽이 못된 그놈이고 영포가 한심한 놈이듯이, 주몽 편에서 대소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에 대소는 권력에 미쳐 한나라와 한패가 된 한심하고 못된 놈인 것이다.

대개 양쪽은 자신의 관점을 절대화한다.
사고방식이 딱딱할수록 그 절대성이 포괄하는 공간은 밥그릇 만하게 쪼그라든다.
각자가 절대화된 자신의 시점에 붙박혀 있는 한 갈등상황에 대한 포괄적 이해도 불가능하고, 서로가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없다. 이로써 또한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밥그릇 만한 의식들의 상대적 타당성들만이 멋대로 충돌하며 사회를 파편화시키곤 한다.

상대주의를 어떤 식으로 넘어서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현대윤리학의 핵심난제일 것 같다.
혹자는 대화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특히 패거리 내부의 대화는 대화가 아닌 독백일 뿐이며, 진짜 필요한 것은 대립하는 패거리들 사이의 대화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어쩌면 중요한 공약수를 찾아내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또한 사회적 갈등을 견딜 만하게 완화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화만으로 갈등이 본질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다. 대화를 통해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서로 충분히 이해하더라도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피차 자신의 이야기만을 다시 늘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대화의 부재보다 이해관계의 대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의 대립을 풀지 못하는 한 대화와 상대에 대한 이해는 상대에 대한 공격의 무기로 활용되기 일쑤다. 또한 스스로를 절대정신이라고 착각하는 크고 작은 상대주의적 사고틀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찢어놓을 것이다.

이처럼 진짜 절대정신이 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제법 현명하고 유능하게 사회적 갈등과 불행을 해소해가는 우리의 주인공을 향해서는 누군가 원한에 차서 끊임없이 ‘그놈’ 혹은 ‘한심한 놈’ 소리를 뱉어낼 것이다. 이러한 저주를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 편히 견뎌내며 남 좋은 일 좀 하려면, 아무도 노골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미래지향적 공리들을 절대정신으로 받아들이라고 권장하고 싶다.

예컨대 아우슈비츠나 히로시마, 노근리나 광주학살, 동백림이나 인혁당사건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러한 공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종청소를 꿈꾸어서도 안 되고 양민들의 머리 위에 폭탄을 퍼부어도 안 되며, 독재권력의 유지를 위해 멀쩡한 국민들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죽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힘 있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다수의 생존권을 위협해도 당연히 안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을 깨고 신당을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은 그런 공리와 동떨어진 것 같다.
그것은 밥그릇 만한 절대정신을 지키려는 패싸움으로 보인다. 대다수 관객들에게 그 싸움의 주역들은 ‘그놈’ 아니면 ‘한심한 놈’일 뿐이다. 하지만 무리한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이나 비정규직 양산법의 전격 가결은 생존권과 관련한 공리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심한 그놈들’을 향한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홍승용 칼럼 29]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6년 12월 4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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