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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미학,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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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시사칼럼]...
"아쉬움 속에 2006년을 보내며..."

이 글을 다듬고 있는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특히, 과거 어느 해의 성탄절보다도 성탄과 십자가와 이웃사랑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오는, 싸움과 곡절이 유독 많고 많았던 2006년의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저의 가슴은 어딘가 대단히 허전합니다. 사흘 전에는 시내에 나가볼 일이 있었는데, 성탄절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 흔한 캐롤송도 들리지 않아, 섬뜩한 느낌이 들기조차 했습니다.

2006년도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온 국민이 꿈과 희망을 안고 시작한 2006년이었습니다만, 이렇게 허무하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얼어붙은 경기 때문인지,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들 때문인지, 과거 어느 해의 연말보다도 가라앉은, 축 쳐진 분위기입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등장한 구세군 자선냄비와 딸랑딸랑 종소리는 무언가에 쫓기듯 걷는 저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깨웁니다. 구세군 종소리는 최소한 저에게는 자선을 구하는 소리를 넘어, ‘당신이 누구인지 성찰하고, 또 지난 1년의 자신을 뒤돌아보라’는 깨우침의 소리로 들려옵니다. 하루하루 발등에 떨어진 일, 내일과 모레 스케줄에 얽매여 허둥지둥 살아가던 저도, 모처럼 지난 한 해를 차분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저의 한 해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 해도 함께 돌아봅니다.

어느 해인들 안 그렇겠습니까만, 올 한해는 특별히 더 아쉬움과 착잡함이 진하게 묻어나는 해였습니다.
서민에게는 더 말할 수 없이 그렇습니다. 낙담과 좌절로 점철된 한 해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부동산 광풍은 서민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습니다. 낙담과 좌절과 배신감이 온 나라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번에도 자신이 이겼다며 커튼 뒤에 숨어 키득키득 돈다발을 세고 있을 불로소득자와 부동산업자들을 생각하면서, 특히 지방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은 대한민국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사교육비도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힘들어 하지만, 어른들도 못할 짓입니다. 이러지 않으면 아이들이 제대로 클 수 없다는 건지, 이러지 않고는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건지, 이 답답함을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는 건지, 속상할 뿐입니다. 사실 고 3에 올라가는 아이를 둔 저희 집도 꼴이 말이 아닙니다.

툭하면 터지고, 터지고 나면 온 나라를 들었다 놓을 정도로 들끓지만, 며칠 전 인터넷에 떠돈 여학생 폭력 동영상을 보면, 아이들은 여전히 폭력문화에 짓눌려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걸 보는 학부모 마음도 꺼멓게 타들어 갑니다. 아이들 사정이 이렇고, 아이를 둔 학부모 심정이 이런데도, 국회는 사립학교법 재개정 논란에 막혀 식물국회 상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을 다시 고쳐야 한다며 성직자들까지 나서 삭발하고 집단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학부모들은 숨이 헉헉 막혀 오는 것을 느낍니다.

얼마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과연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과 설움을 얼마나 헤아려 만든 법인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법으로는 안된다고 절규하는 목소리가 숙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걱정이 앞설 뿐입니다.

왜 이럴까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그 중요한 제도들마다, 그리고 그 중요한 대목들에서마다 왜 이렇게 부딪치고 안 풀리고 꼬이기만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해 낸 저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리 함께’와 ‘나눔’의 미덕이 결여된 우리 사회의 천박한 문화인 겁니다. 그 큰 문제들의 원인을 어떻게 하나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짚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나 하나만의 성공과 독식을 추구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그리고 ‘그 극단적 이기주의들이 부딪쳐 만들어 내는 적대적 갈등과 분열의 문화’를 짚고 싶습니다.

물론 구세군 자선냄비에 작은 정성을 담는 우리 서민들을 보면, 저는 우리 사회가 결코 ‘우리 함께’와 ‘나눔’에 인색한 사회는 아니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수해가 났을 때, 이웃이 큰 재난에 부딪쳤을 때 십시일반의 정신을 실천하는 우리의 오랜 전통과 문화를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결코 옹색하고 척박한 사회만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함께’와 ‘나눔’의 정신을 거시적 차원에서 실천하고 제도로 만들어 갈 때는 달라집니다.
미시적 실천에는 강하지만 거시적 고민과 제도화의 실천에서는 약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 건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는 숙제입니다. 아마도 거시적 사회운영과 제도 만들기를 담당하고 있는 힘센 분들의 정서가 서민사회에서와는 달리 ‘우리 함께’와 ‘나눔’의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 분들도 입만 열면 좋은 얘기 다 합니다.
하지만 그 분들의 달콤한 이야기와 그 분들이 실제로 만들어 내놓는 제도는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 함께, 나누는 사회’를 만들다 보면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 가운데 너무 많은 것을 내 놓아야 하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혼돈과 절망의 와중에서도 희망의 싹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수도권의 175개 공공기관을 지방에 이전해 혁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은 지난 한 해 동안 차질없이 추진되어 왔습니다. 수도권의 공공기관 근무자들의 대승적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또 우리은행이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역시 정규직 직원들의 희생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지역에서도 대구와 경북이 경제통합을 위해 매진한다는 원칙을 천명했고, 가시적인 성과들도 이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행정 관행과 기득권을 깨겠다는 결단 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그래도 많아지는 연말입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들로 그 분들이 좀더 따뜻하고 훈훈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하지만, 좀더 소망컨대는 ‘우리 함께’와 ‘나눔’의 미덕을 거시적 사회운영과 제도 만들기의 차원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좀더 밝고 살맛나는 2007년을 만들어 가는 밑거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7년 새 해에는 ‘우리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실천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홍덕률시사칼럼 68]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 홍덕률 교수는, <대구경북 분권혁신아카데미> 원장과 <대구사회연구소> 부소장, 대구대학교 <시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홍덕률의 시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6년 12월 26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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