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바로 당신이 희망입니다"

평화뉴스
  • 입력 2007.01.29 10: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재경의 세상보기]...
"넘어지더라도, 손에 잡히는 게 없더라도 YOU, 당신이.."


필자가 유학을 갈 때는 대단한 사람만 가는 거라고 생각할 때였다.
1983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외국에 나간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조차도 아득해 보였으니까... 그런 필자가 유학을 결심한 것은 고매한 학문탐구를 위해서도 아니요,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서도 아니다. 필자는 소위 말하는 “출세”가 하고 싶어서였다.

필자의 어머니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책방을 하면서 겪는, 없는 사람의 세상살이방식이 도저히 출세를 하지 못하면 못벌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배운 것도 없고 일찌기 혼자가 된 어머니는 새벽에 나가 헌 책을 사모아와 하루종일 장사를 하곤 저녁 11시 다되어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시곤 했다.

그래서 필자는 중학교때부터 매일 저녁 저녁밥을 내다드려야 했고, 방학때와 학기초엔 어머니와 함께 책방에서 장사를 해야 했다. 장사하는 일은 그래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헌 책을 통해 보는 세상은 넓고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우리 책방에 정기적으로 수금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 표현을 빌면 세금쟁이와 형사들, 깡패와 거지들이었다. 특히 세금쟁이와 형사들이 아침“개시”도 하기 전에 와서 책방을 기웃거리면, 어머니는 여기저기서 주섬주섬 돈을 모아 넘겨주셨고, 그 때가 끼니때라도 될라치면 식사를 사줘 보내곤 했다.

또 가죽잠바 입은 힘꺠나 쓸 것같은 깡패들이 책방을 쭉 순회하면 역시 그들에게도 건네줘야 했고, 거지들이 오면 손님들이 그냥 지나갈까봐 빨리 줘서 보내야 했다. 필자는 어머니에게 고발하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 놈이 그놈이야”“힘이 없어서 그래”, “남자가 없으니까..”“나쁜 놈들...”하면서 넘어가곤 하셨다, 필자가 출세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이 때였다.

출세해서 보란 듯이 무협지의 도사처럼 한 검으로 이들을 날리고 싶었다.
기생해서 사는 거머리같은 이 사람들을 정의의 무검으로 한 판 날리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아득한 30여년전의 얘기지만, 돈도 없고 뺵도 없는 처지에서, 교수가 신청해 받아준 독일대학의 입학허가서는 출세의 입구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대책도 없이 시작한 것이 필자의 독일유학생활이었다. 공부를 마친 뒤 지금은 출세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가고 있지만, 이젠 “힘깨나 쓰면서 자리를 꿰차는” 출세의 의미가 얼마나 부질없음을 안다. 내가 생각한 출세의 의미가 얼마나 “유식한 멍청이”가 하는 세태와의 부조리한 영합일 수 있는가를 안다.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YOU"를 뽑았다. 바로 익명의 ”당신“들을 뽑았다.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어울려 살아가는, 그러나 소금처럼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뽑았다. 아마도 금력과 권력에 휘둘리기 보다 삶의 내실적 진정성을 찾아나갈 줄 알고, 자기계몽과 성숙의 길을 찬찬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라는 의미일거다.

반크의 젊은 학생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역사지리정보를 외국에 더 잘 알려내고, 평범한 대학생이 인디고라는 서점을 만들어 청소년들에게 자연스럽게 인문학적인 소양을 키워내는 장을 만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재야서지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도저히 이뤄질 것 같지 않았던 인각사의 보각국사비를 재현해내고, 도닦는 심정으로 한글체에 10년을 매달리면서 세로쓰기 전용폰드도 만들어내고...또 나중에 올 누군가를 위해 지금도 “세심원” 주변에 차(茶)씨를 심고...또 스스로도 가누기 힘든 굽은 몸으로 낡은 유모차에 휴지를 모아 장학금을 주고...

그러고 보니 이런 귀한 사람들이, 농축 근대화를 통해 급조된 이 사회에서, 잃어버린 윤리적 가치를 되찾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민주주의의 근본을 다지고 있다. 다는 아니라고 해도, 많이 가진 사람들이나 가방끈이 긴 엘리트들이 전문성의 그늘에 숨어 자신의 욕심의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사이, 너와 나정도의 비슷한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못살아도 느긋한 마음으로, “떡도 안되고 돈도 안되는” 일에 매달리면서 소리소문없이 자신의 터와 역사를 매만지고 있는 것이다.

줄기없이 잔가지들로 혼란스러운, 조급한 셈에만 능한 어지러운 세상이다.
불확실한만큼 사회적 성숙이 아쉽고, 그 어느 때보다 삶의 절제가 필요한 때 같다.
지금은 두루뭉술한 타협이 아닌, 복잡다단한 현실을 지나치면서면서도 본질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를 양보하지 않는 집요한 지향성과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년 새해에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은, 동네북처럼 타박당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넘어지더라도, 고생한만큼 손에 잡히는 것이 없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삶(살아 있음)에 대한 경건성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면 역사를 창조하는 많은 "YOU"들이 모자이크로 만들어낸 떳떳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분명 펼쳐지게 될 것이다.


[김재경의 세상보기 29]
김재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방송인. 사회학 박사. kgklan@kornet.net)
* 1960년 서울에 태어난 김재경 박사는, 2001년부터 대구MBC 라디오 프로그램 '김재경의 여론현장'을 매일 아침 진행하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김재경의 세상보기'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월 22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