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학생들 엠티 덕분에 오랜만에 경주 구경을 했다.
관광지라는 고정관념과 무관하게 살기 좋은 동네 같다. 전봇대와 전깃줄의 압박 없이 맘껏 자라는 길가의 벚나무들이 매력의 주요 원천이었다.
헌데 경주를 빠져나오는 길에는 아름드리 가로수 여러 그루가 잘려 밭둑에, 논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 길을 넓히려고 하는지, 아니면 가로수 그늘을 미워하는 땅임자들의 만행인지, 적어도 수십 년은 묵었을 고목들이라 아쉬운 마음에 한 순간 가슴이 쓰렸다.
지구촌 한쪽에서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굶주림으로 원시적인 질병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겨운데, 더욱이 한미 FTA로 온 나라가 전쟁판인데, 한가하게 가로수 타령을 늘어놓아 조금 멋쩍기는 하다.
한때 브레히트는 험난했던 자신의 시대를 “나무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수한 범죄들에 대한 침묵을 뜻하므로 범죄나 다름없게 된 시대”라고 읊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무들의 수난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앞 동네에서는 새로 주공아파트를 짓는다고 수백 그루의 다 큰 나무들을 무참히 토막 내고 뿌리째 뽑아 버리고 말았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왜 가로수들을 꼭 전깃줄 아래 줄맞춰 심어놓고 죄 없는 나무 머리는 뎅강뎅강 잘라버리는지 늘 전봇대와 전깃줄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디 나무들뿐이랴. 옆 동네에서는 덤프트럭들이 며칠 드나들더니 멀쩡한 옥답들이 깔아뭉개지고 다져져 어느새 빌딩들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큰 나무들 피해가는 '곡선도로'를 용납할 줄 아는 나라"
경쟁력 없는 것들은 그저 잘라내고 밀어버려야 한다는데 누가 말릴 이유도 마땅히 없는 듯하다.
이른바 경쟁력이라는 신호에 모두들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조아리는 사회가 된 것 같다.
근래에는 바이오 에너지가 새로운 경쟁력 유망주로 떠올랐으니, 이제 능력 있는 사람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가난한 나라 경쟁력 시원치 않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줄 곡물부터 경쟁적으로 에너지 생산에 쏟아 부으려 들까 두렵다.
브레히트가 나무를 조금 우습게 표현한 것과 달리, 그의 조국 독일은 나무 중심 문화국 같다.
새 길을 내면서도 큰 나무들을 피해가는 곡선도로를 용납할 줄 아는 나라라나. 그만큼 직선만 인정하는 단거리 경쟁력으로 사람 잡는 분위기도 우리보다 훨씬 덜한 듯하다. 우선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사교육 시장바닥으로 내몰리거나, 서울대를 향해 혹은 법대와 의대를 향해 일렬로 줄설 필요가 없는 나라라 부럽다.
그 여유의 밑바탕이 무엇인지, 그 속의 잘 보이지 않는 경쟁들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해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말 못하는 나무들을 자동차의 속도만큼이나 존중할 줄 아는 문화는 한 차원 선진적임을 일단 인정하고 싶다.
물론 독일은 바이오 에너지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유행어들 역시 막강한 독점력까지 갖춘 환경산업체들의 끝없는 패권주의에 광범하게 오염되어 있어, 부단히 다시 살피는 수밖에 없다.
"간단한 셈법으로 도저히 어림잡을 수 없는 가치"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태주의는 근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인을 사로잡고 있는 자본주의적 욕구와의 싸움만 아니라 기독교적 박애를 넘어 불교적 생명존중, 나아가 존재자 전반에 대한 경외까지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타자들, 인간만 아니라 타 생명체들, 심지어 타 물체들까지도 함부로 대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조급한 합리주의자들의 눈에 먼 옛날의 애니미즘 문화로 돌아가자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미물들까지 가벼이 대하지 않는다면 어찌 인간인들 차별하고 천시할 수 있겠느냐고, 애니미즘 문화의 긍정적 기능을 새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력의 논리로 따지더라도 이제 환경의 가치는 간단한 셈법으로 도저히 어림잡을 수 없게 되었다.
농업의 가치는 더 급박하게 변해갈 것 같다.
그런데 식량자급률 30%도 안 되는 우리나라가 단기적 경쟁력 계산의 주술에 홀려 끊임없이 논과 밭을 도로와 택지로 바꿔놓고 향후 핵폭풍의 위력으로 닥쳐올 식량무기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아찔하다. 기본 생존을 위한 농산물의 가치와 LCD나 자동차의 가치는 결코 같은 평면에서 비교될 수 없다. 농업이야말로 복합적 잠재력을 가장 풍부하게 내장하고 있는 첨단 경쟁력인 것이다.
막 터져 나오는 새잎들이 꽃보다 더 감격스럽다. 아름답지 않은 잎이 없다.
엉터리로 계산된 경쟁력을 신주단지로 떠받드는 것보다는, 생명의 원소인 산소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나무들을 신으로 모시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맑은 물과 저 따사로운 태양은 또 어떤가. 흙, 바람, 풀, 나무들과 대화하는 것도 인간 행복의 주요원천 아닌가.
[홍승용 칼럼 31]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4월 16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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