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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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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시사칼럼]
"4월의 슬픈 단면, 그리고 대구시민사회와 지식인의 고뇌"


[장면 1 -- 재벌 총수와 경찰]

3월 8일 저녁에서 9일 새벽.
성남시 청계산의 한 공사장과 서울 북창동의 한 술집에서는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의 대표 재벌 가운데 하나인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수십명의 경호원들, 심지어 조직폭력배와 함께 자신의 아들을 때렸다는 OOO클럽 종업원들을 두들겨 팬 것이다. 회칼도 있었고 전기충격기와 야구방망이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경찰청장은 이미 지난 3월 말에 이 사건의 개략적인 내용을 첩보로 보고 받았다. 관할 서인 남대문경찰서에 내려보내고 서울경찰청장에게도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은 한달 가까이 꿈쩍 않고 있었다.


알고 보니, 한화그룹의 고문으로 있는 최기문 전 경찰청장이 위 사건 관할 경찰서인 남대문경찰서의 OOO 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남대문서장은 최기문 전 경찰청장의 고등학교 3년 후배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경찰은 위 사건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나서야 허둥대며 김승연회장과 그 아들을 소환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이미 출국한 뒤였다.

마치 조폭 영화 보듯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들이 이런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절망한다. 그러나 그 절망은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절망을 직감한다. 결국 김승연회장이 재판을 받고 사법처리 되겠지만, 피해자와 돈으로 합의했고 또 ‘그동안 한국 경제에 끼친 공이 적지 않다’는 이유로 얼마 안가 풀려나게 될 것이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싶게 잠잠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 한두 번 봐 온 일인가?

법이 무섭지 않은 재벌, 깡패들을 대동하고 식칼에 총까지 들고 마치 무법천지처럼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재벌 총수, 그런 재벌이 무섭고 눈치보이는 경찰, 돈 몇 푼에 재벌의 방패막이가 되어버린 전직 경찰총수, 그와 함께 어물어물 재벌의 수족이 되어 버린 고등학교 대학교 고향 선후배들, 그런 사이 공권력이 통째로 무력화되고 사회가 온통 재벌 세상으로 둔갑해 버리고 마는 대한민국, 또 그렇게 끝나겠지 하며 냉소하는 국민…… 우리 사회의 진면목과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아주 훌륭한 <한국사회론 부교재 1>이다.


[장면 2 -- 돈과 정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던 2006년 이맘때 쯤. 대구 서구는 구청장 및 시 의원 공천 과정에서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던 선거구였다. 결국 당원에게 선물을 돌린 한 시의원은 당선 무효처리됐고, 12명의 한나라당 당원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과태료 처분을 받은 12명의 한나라당 당원들이 억울하다며 볼멘소리를 낸 것이다. 과태료 납부 기한을 코앞에 두고, 한나라당 서구 선거구 사무국장은 과태료 합계 3천만원을 대납한다. 이 사실이 제보되고 수사에 들어가자 윤진 서구청장이 지난 23일, 대납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나선다. 지역구 책임자인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는 아직 아무런 말이 없고, 윤진 서구청장은 위 사건이 강대표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경남 거창에서의 후보 매수 사건, 경기도 안산에서의 돈공천 사건 등과 맞물리면서, 한나라당은 4.25 재보선에서 참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떼기당과 부패당의 낙인을 털어내겠다며 한때 천막당사로까지 옮겨 읍소하던 한나라당이 과연 변한 것이 뭐냐며, 한나라당에 기대를 걸던 적지 않은 국민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누르고 한탄을 한다. ‘한나라당에게 부패는 본능이요 천성이요 본질이 아닌가?’ 많은 국민은 지금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거대야당, 과거 30여년의 집권 경험을 자랑하는 한나라당, 그 당원과 당 실력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며 어떤 정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한국정치론 부교재 1>이다.


[장면 3 -- 다시 고개 드는 지역주의]

지난 주에 실시된 4.25 재보선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한나라당 참패니, 열린우리당은 유구무언이니,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몸값이 올라갔다느니, 민노당 어디 갔느니 등등……대선을 앞두고 주판알 굴리는 주자들, 곧바로 이어질 국회의원 총선을 놓고 얄팍한 계산에 분주한 정치꾼들의 머리 속이 갑자기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다. 지역주의의 망령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일등공신은 지금 어느 당보다 희희낙락한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다. 여기는 내 텃밭이라며 금그어 놓고. 소위 텃밭 정서를 자극해 당과 당료 몇몇의 몸값을 올리고 그것을 가지고 대선 국면에서 자신의 지분을 높여 보겠다는 식의 철저한 당 이기주의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국민의 장래와 국가의 비전을 구상하는 정치 본연의 사명감도, 지역주의의 폐해를 걱정하는 최소한의 정치윤리도 없다.

여전히 저급하고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낡은 정치판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피토하는 심정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며 애써온 전진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되돌려 놓고 만, 그런 의미에서 4.25 재보선은 한나라당에게만이 아니라 지역주의 청산을 염원해 온 많은 국민들에게도 악몽 그 자체였다. 지역주의의 망령에 여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앞으로도 꽤 긴 시간 그럴 것 같은, 한국 정치의 슬픈 단면을 보여준 <한국정치론 부교재 2>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렇게 어둡고 슬픈 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열흘 동안에도 우리 사회의 밝은 미래를 점칠 수 있게 해주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도 대구 시민사회가 특히 그랬다. 필자가 직간접으로 겪은 몇 가지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장면 4 -- 다채로워지고 있는 대구 시민사회]

지난 4월 20일에는 <대구여성의 전화> 창립 20주년 기념행사가 문화웨딩홀 5층에서 열렸다. 성황이었고 행사 내용도 재미있었다. 특히 지난 20여년 동안 여성의 전화가 이룩해 낸 여성 인권의 신장이 감격스러웠다. 4월 23일에는 대안가정운동본부 창립 5주년 후원 행사가 진석타워에서 열렸고, 또 녹색소비자연대는 4월 7일부터 28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앞산 숲속학교>라는 이름으로 생태교육을 실시하였다.

4월 27일에는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대구경북분권혁신아카데미 법인전환 기념식 및 후원행사>가 제이스호텔에서 열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분들이 직접 찾아와 격려해 주었고, 특히 ‘철부지’ 할아버지들과 의성군의 작은 초등학교 분교학생 전원으로 구성된 어린이 합창단 공연은 참석자 모두가 좋아하였다.

같은 날 문화웨딩홀에서는 장애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대구DPI가 <맥(脈) 서구 장애인자립생활센터> 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 행사를 가졌으며, 역시 같은 날 저녁에는 저소득 소외계층에게만 돈을 빌려주는 '작은 은행' <마이크로 크레딧(Microcredit)> 창립행사가 대구그랜드호텔에서 개최되었다. 다음날인 4월 28일에는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 가족 동반 체육대회가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비호동산에서 열렸다. 장애인과 어린 아이들, 각 단체 실무자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봄볓을 만끽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4월 28일, 한국 사회과학계의 진보ㆍ개혁을 대표하는 한국산업사회학회 학술행사가 역시 대구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서 열렸다. 필자는 필자가 책임지고 준비한 대구경북분권혁신아카데미 행사와 한국산업사회학회 행사를 비롯해,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대구여성의 전화 행사에는 주욱 참석하여 함께 했고, 시민사회단체 체육대회에는 학술행사 중간 중간에 잠시잠시 들러 볼 수 있었지만, 행사 시간이 겹쳤거나 시간을 맞추지 못한 다른 행사들에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지나간 4월 말의 열흘은 필자에겐 무척 바쁘기도 했지만, 모처럼 신나는 열흘이기도 했다. 그 즐거움은 대구 시민사회도 5년 전, 10년 전과 비교하면 훨씬 다채로워지고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사회운동도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 이 좋은 봄날 토요일 저녁에도 전국에서 모여든 사회학자들이 국가와 노동과 환경의 내일을 고민하고 우리 생활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머리 맞대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슴벅찬 일이다.

시민운동하는 지역 인사와 지역의 제도권 책임자들이 지역과 나라의 내일을 헤쳐가는 방법론으로 분권과 혁신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갖가지 가정해체로 신음하는 죄없는 어린 아이들을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며 나서는 진정 용기있는 선구자들, 서민 가계를 걱정하며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하나를 책임지겠다는 뜻있는 분들의 진지한 몸짓들, 장애인 인권을 주제로 꾸준히 실적을 쌓아가고 있는 DPI의 사업 확대, 생태를 걱정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우리 대구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열흘은 아주 훌륭한 <대구 시민사회론 부교재 1>이라 할 만 했다.

그러나 필자에겐 또 하나, 무척이나 진하게 마음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지난 4월 20일, 경북대학교에서 있었던 이 시대, 우리 지역 지식인들의 고뇌 장면이 그것이다.


[장면 5 -- 지식인의 고뇌]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지만 큰 행사였다. 지난 4월 20일 오후 4시부터 6시 30분, 경북대학교 교정에서였다.
토지정의운동으로 잘 알려진 김윤상교수가 좌장을 맡은 <복현 콜로키움>의 창립 세미나였다. 주제는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교수와 경북대 법학과의 김두식교수의 한국 지식인 사회에 대한 뜨거운 성찰과 문제제기가 쏟아졌다고 하며, 60여명의 교수가 함께 자리해 열띤 토론을 나눴다고 들었다. 지난 시대의 명(明))과 암(暗)) 모두에 일정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지식인들이 고뇌와 성찰의 시간을 함께 가진 것이다.

물론 이런 주제의 이런 토론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유사한 논의와 문제의식은 꾸준히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의 행사는 지역의 교수와 지식인사회가 오랜 무기력증과 침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능주의적 재능만이 마치 우리를 잘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더 나아가 마치 세상을 구해 낼 수 있는 것처럼 요란하게 큰소리치는 물신화된 세상에서 감히 그건 아니라며 나설 수 있는 지식인, 학자적 양심과 지식인의 역사적 사명감으로 무장한 참지식인들이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발언에 앞서 성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지만 큰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필자가 이 모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성찰보다 더 큰 감동과 전진의 에너지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날로 다채로워지고 있는 대구 시민사회, 자기성찰에서 출발해 사회적 역할을 이야기하고 나선 지역의 지식인들. 온갖 추태와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부디 우리 함께 희망을 놓지 말자고, 우리는 얼마든지 보다 밝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호소할 수 있게 만드는 희망의 끈이 아닐까 한다.


[홍덕률시사칼럼 70]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 홍덕률 교수는, <대구경북 분권혁신아카데미> 원장과 <대구사회연구소> 부소장, 대구대학교 <시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홍덕률의 시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7년 4월 30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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