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어를 대상으로 한 산업전시회나 박람회마다 잡화상 방식의 종합전이라는 일각의 비난을 받아왔던 대구 엑스코는 이를 통해 ‘퍼블릭 전시회의 성공 가능성’을 피력했다. 슈퍼카 페스티벌의 성공을 계기로 엑스코 주관의 또 다른 퍼블릭 전시회인 대구국제식품산업전, 베이비페어 등도 더욱 상승세를 타지 않겠느냐는 분석도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은 줄지어 인내심 있게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관람표 매매 창구 또한 쉴 새 없이 회전되었다.
전시장 입장을 포기한 사람들도 건물 앞 광장과 전시장 입구 홀에 전시된 슈퍼카와 사람 구경으로 여념이 없다.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은 제 각각의 소집단을 이루며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 다른 행성처럼 정지해 있다.
“기계실에는 자동 방적기, 자카드 식 방적기, 편지 봉투 만드는 기계, 증기 직기, 기관차 모형, 원심 펌프, 견인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 기계가 모두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한편으로 실크해트와 카포트를 입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한구석에 앉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 인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 얌전한 모습으로 말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의 눈앞에 내밀어진 그러한 전시물들은 사회 변혁의 필연성과 생산 수단의 발전이 가져 올 경제적 가능성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모더니티로 도약하는 힘인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의 위기라는 파괴적인 영향을 가졌음을, 적어도 부르주아들은 알고 있었다.
슈퍼카 페스티벌의 시회장에는 25억원짜리 엔초 페라리, 18억원의 마세라티 MC12 등 슈퍼카 7대와 세미슈퍼카 15대, 국내 일류 레이싱 모델들이 최고급 전시 장치 위에 전시되었다. 그 모두는 전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상품과 특제품
<세계 최고의 명차인 슈퍼카 전시회란 대중적 아이템이 많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특히 국내 처음 소개되는 슈퍼카 부가티 베이런을 전시하는 것이 자동차 마니아들의 발길을 끌었다.
시가 35억원짜리 슈퍼카인데다 국내 최정상급 레이싱 모델인 김시향씨까지 더해져, 부가티 베이런 주위에는 온종일 사진을 찍으려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엑스코 박상민 전시팀장은 “이 차를 빌리지 못했다면 이번 행사는 아예 열지 않았을 것"이라며 두 달간 공들여 어렵게 빌려온 부가티 베이런을 이번 행사의 최대 성공 요인으로 내세웠다>(2007. 6. 10. 영남일보)
박람회는 상품의 우주, 상품이라는 물신을 위한 순례지로 상품이라는 물신을 어떻게 숭배해야 하는지 의례를 정한다. 박람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상품의 사용가치는 뒤로 밀려나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미화된다. 특제품이란 사치품 산업에서 등장한 상품 표시 방법을 말하며 옥좌에 앉힌 특제품을 특별히 둘러싼 빛은 기분까지 바꾼다.
만지지 말 것
"만국 박람회는 소비에서 배제된 대중이 교환가치에 대한 공감을 교육받는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어떤 것이든 보는 것은 좋으나 만져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을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슈퍼카 페스티벌.
슈퍼카 페스티벌의 25만 관람객은 소비에서 배제된 대중으로서 그들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교육을 스스로 행한다.
어떤 것이든 보는 것은 좋으나 만져서는 안된다는 규칙은 개인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교육을 위해서가 아닌 향유를 위한 소비이자이므로. “만지지 말라고? 그럼, 셀카 찍어 주세요.”
매일신문은 5월 3일, 5월 31일, 6월 5일, 6일, 7일, ‘2007 슈퍼카 페스티벌’에 대한 대대적 예보 이후 6월 11일 ‘슈퍼카 주말 관람객 장사진’이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마무리하였다.
영남일보는 4월 19일, 5월 7일, 5월 24일, 5월 25일, 6월 5일 등 꾸준한 관심을 보이다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6월 9일 ‘EXCO 슈퍼카 페스티벌 대성황’이라는 제목으로 일단의 총정리를 하였다. 두 신문은 직접, 간접적으로 ‘전시장 협소’를 거론 하며 제 2의 엑스코 건설에 대한 당위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슈퍼카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6월 10일, 오후 1시 45분, 야외전시장에서 데모드라이빙하던 페라리 차량이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플라스틱 방호벽에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튕겨진 방호벽에 맞아 쓰러진 초등학생에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아 격렬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6월 12일 영남일보는 사회면에 이에 대한 기사를 실었으며, 같은 날 매일신문에는 “(이코노피플) 슈퍼카 페스티벌 성공주역 김해운씨”라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엑스포들
그러나 만국 박람회에 앞서 먼저 '국민 규모'의 산업 박람회가 1798년 파리에서 개최된바 있다. 이 최초의 박람회는 노동자계급을 즐겁게 해 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면에 내걸고 열렸는데, 시골장 형태의 국민축제로 실제로 노동계급에게 해방의 축제가 되었다. 노동자계급이 고객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 노동 연맹의 역사를 보면 산업 제품들의 전시와 함께 그림 전시회,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경기들, 예를 들어 미끄러운 나무 오르기와 같은 경기들이 함께 열렸다.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오락 산업의 틀을 민중 축제가 마련해 주었다.
런던의 국제적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파리는 이후 1855년(제 1회 만국박람회), 1867년 (제 2제정의 절정을 과시하는 만국박람회), 1878년(패전 후의 부흥을 증명하기 위한 박람회), 1889년(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박람회) 만국 박람회를 차례로 열면서 현재 국제규모의 만국박람회 개최 자격을 좌지우지하는 왕좌를 거머쥐고 있다.
현재 엑스포는 국제적 규모로 개최되는 문화와 산업에 관한 박람회로 만국박람회, 세계박람회, 국제종합박람회 등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대표적 국제박람회인 만국박람회는 파리에 있는 박람회 국제사무국의 승인 박람회와 비승인 박람회가 있으며 각각 개최 조건의 수많은 열거들을 가지고 있다.
지금, 각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박람회들은 최초의 박람회였던 파리의 국민 축전 형식으로 복고되었다.
국제 협약이라는 옷을 입은 유럽 제국주의의 공고한 뉘앙스는 각국 정부 간의 사업에 적용될 뿐 지방정부에 있어 ‘국제’라는 단어는 조건과 승인의 영역에서 무관해졌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경계가 사라진 지는 우주만큼 오래되었으며 이미 모든 것이 국제적이다.
유토피아 혹은 벨 에포크를 향하여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현재의 건물은 당시 합당한 이유 없이 2등 작에게 설계 계약권이 넘어갔다가 1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다시 설계권을 찾아 지어진 것으로 지금의 건물도 원 설계의 일부분을 삭제 수정하여 지은 것이다.
최초의 박람회장이었던 런던의 수정궁 이후 그에 필적할 만한 일련의 건축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파리의 경우 산업관과 가설 궁전들이 만들어졌으며 육교가 설치되고, 유명한 기계관과 에펠탑이 세워졌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있는 에펠탑이 만국 박람회와 당대의 신 철기 시대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1914년 쉐르바르트의 <유리건축>을 보면 유리의 사용은 유토피아와 관련해 등장하고 있다.
박람회를 전후로 세워진 건축물들은 그 도시와 시대의 유토피아 이미지, 벨 에포크의 상징으로 만드는데 기여하며, 역으로 박람회는 그러한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위한 빌미가 되기도 한다.
전시컨벤션센터의 공간성과 접근성에 대한 꾸준한 재론, 이번 슈퍼카 페스티벌을 전후로 지역 언론에서 다룬 자기부상열차, 그리고 이미 엑스코 코앞에서 터파기를 시작한 호텔은 교착점을 가진다.
6월 10일 밤 9시 40분 동대구로에는 일제히 깃발이 내걸렸다.
급정거한 트럭에서 재빨리 내린 두 명의 사내는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검은 플라스틱 밴드로 깃발을 고정시켰다. 깃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형 자기부상열차 세계육상대회와 함께. 대한건설협회 대구광역시 회원 업체 일동"
교착은 점이 아닌 선적이며 상기의 것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과 얽혀 있다.
글.사진 평화뉴스 류혜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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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7년 6월 14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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