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식구와 휴가 온 친척집 아이들까지 데리고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방학이라는 핑계로 공부와 한참 담쌓고 노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현대사 공부라도 조금 시켜볼 작정이었다. 예상 밖으로 아이들은 졸거나 몸을 비틀지도 않고 끝까지 영화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듯했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아이들 눈을 피하며 수시로 눈물 훔치기에 바빴다. 이미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조금도 옛날이야기 같지 않았다.
관객의 마음을 붙잡는 요인들이 적절하게 활용되는 느낌이었다.
신애와 민우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는 파릇한 애정과 인봉의 재기발랄한 말솜씨로 인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도입부부터 따끈하면서 속도감 있었다. 그 따끈함이 학살의 처절함과 대조되어 비극성이 살아났다.
실제사건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단순한 구성도 몰입을 도왔다.
회상이나 관찰자를 끌어들여 사건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쓰지 않고 주인공들과의 직접적인 동일시를 유발함으로써, 주인공들의 비극은 관객의 공명판을 쉽게 울려주었다. 특히 그 주인공들이 특별한 정치적 존재가 아니라 작은 소망을 안고 성실하게 사는 평범한 이웃들이라 동일시는 더욱 편했다.
동일시는 종종 관객들의 냉철한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점에서 경계대상이기도 하다. 작가의 정치관 내지 세계관이 독재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장치이며, 무엇보다 전체 판을 조망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허나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알 만큼 아는 상황에서는 영화의 페이스에 군소리 없이 말려드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직도 광주를 우려먹고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내던 보수 네티즌들이 이 영화의 정치적 폭발력에 어찌 반응할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역시나 정치권은 기민한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바로 엊그제까지 뻔뻔하게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미화하던 박근혜 후보는 광주사람들의 표심을 감안해서겠지만 속 거북한 화해의 제스처와 함께 광주의 아픔을 들먹였고, 별 뉴스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 감상평을 보수언론들은 여과 없이 일제히 뿌려댔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에 빠져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광주를, 진우와 민우와 인봉의 죽음을, 신애의 호소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군인들이 시민들을 개 패듯이 패고 가차 없이 쏴 죽인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광주학살의 주범들을 상대로 용서와 화해라는 말을 입에 올려서는 절대 안 될 것 같다. 그들과 태생적으로 한 몸인 정치 집단에 대한 광주의 심판은 결코 쉽사리 종결되지 않을 것 같다.
"광주의 물음...이런저런 이유를 달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물론 광주 이후로도 무수한 갈등과 모순 속에서 민중들의 고통은 구조적으로 누적되어 왔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집권한 다음에도 양극화는 꾸준히 심화되고 있다. 천만에 육박하는 비정규직들이 매일 겪는 불안과 박탈감과 절망을 광주의 비극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랜드 사태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모순 내지 경제적 불평등이 이 시대의 가장 큰 고통으로 떠오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 특히 미국에 대한 의존상태로 인한 멍에도 끈질기게 우리 민족을 짓누르고 있다. 세계의 평화공존이라는 대의를 포기한 대가로, 반테러의 허울 아래 침략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른 업보로,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놓고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서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 우리 외교의 현주소 아닌가.
그래서 광주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손학규 후보의 주장도 그저 터무니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서야 할 광주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화려한 휴가’가 알기 쉬우면서도 가슴 아프게 보여주는 광주는 부당한 권력 혹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도단의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항정신은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라도 기르고 지켜야 마땅한 가치 아닌가. 혹시라도 쿠데타와 독재자에 대한 대중들의 향수를 무기 삼아 파쇼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면, 광주의 정신은 무엇보다 더 소중한 민주적 가치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영화의 끝부분에서는 좀 더 괴로운 물음이 관객을 얽어맨다. 모든 전략과 전술이 고갈되고 상황파악이 끝난 다음, 끝까지 남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순간, 죽음의 현장을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 각자 선택해야 하는 순간, 과연 나는, 또 너는, 이런저런 이유를 달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이 괴로운 물음은 80년 광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인류사 속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되풀이될 수 있는 보편적 물음이다. 나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80년 광주 도청에 끝까지 남아 피 흘리고 쓰러지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홍승용 칼럼 33]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8월 6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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