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평화뉴스
  • 입력 2007.09.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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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임
"시집을 빼들었다. 내게 남은 너의 흔적인 것 같아.."


"바람이 불면 나를 유혹하는
안일한 만족이 떨쳐질까
바람이 불면 내가 알고 있는
허위의 길들이 잊혀질까...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0년도 더 지난, 구닥다리 낡은 CD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얼마만인지...

지난 여름에, 나는 많이 아팠다.
한 20여 일 장기 출장을 다녀왔고,
다녀와 한 20여 일을 몸살과 장염으로 앓아누워있었다.
생각해보면 철저히 혼자였던 그 시간, 나는 너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몸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거나,
아주 낯선 곳을 혼자서 여행 할 때...
너무나 예쁜 풍경 엽서를 샀는데, 문득 외우고 있는 주소가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럴 때면 나는 가끔 네 생각을 했다.

1년에 두어 차례 호된 몸살을 앓는다던 네가,
그때마다 읽는 책이라며,
아파 누워있던 내게 위문품으로 건네줬던 그 책을 다시 꺼내 펴 본 것도,
이번 여름이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검정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게 너인지, 나인지 이젠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 이게 너구나... 싶어져, 네가 많이 보고 싶었다.
어쩌면...
너와 함께이던 그때의 나, 내 모습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프다는 건 그래서 때론 좋은 것 같아.
식은땀을 흘리며 운신도 못할 정도로 아파 누워 있다가,
어느새 말짱하게 나아,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밖을 나가면,
세상이 달라 보이니까."

그렇게 말하던 넌,
아직도 그렇게 사니?
가끔 묻고 싶지만,
사실 조금 두려웠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살까봐,
혹은 이제는 네가 그렇게 살지 않을까봐...
그렇게 연락을 하지 못했다.

여름 날,
낯선 곳을 떠돌면서 나는 참 아등바등했던 것 같다.
숱한 사진들을 찍었다.
꼭 간직하고 싶은 느낌들을 내 안에 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안간힘을 썼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파버린 것 같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소유해야 안심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 순간에 네가 떠오른 건 정말 다행이다.
넌, 내게
그 사람에 대한 소유욕보다는, 그 존재가 내 존재에 일깨우는 의미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다.

정확한 표현에 집착하던 내가,
이제는 표현이 품고 있는 느낌들에 집착한다.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이 진정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소한 느낌의 차이를 포착하는 일. 그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삶을 안다는 것은, 그 차이를 안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름이 끝났다.
네 말처럼 아프고 나니, 세상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계절이 달라졌다.
여름 내내 시 한 편 읽지 않고 무디게 살아왔던 내가,
너에게 주려고 시집을 빼 들었다.
내게 남은 너의 흔적인 것 같아, 내 마음을 담아 시를 동봉한다.
이만 총총.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이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

-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 <느낌> 전문

[주말 에세이 54]
이은임(TBC 방송작가)



(이 글은, 2007년 9월 15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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