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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손귤, 다시 '아웃도어'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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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문화人③] 설치미술가 손귤(40)
..4년 전 대구서 첫 선, 올 12월 2년 만에 '아웃도어'전


삼덕동 문화 1가의 Out Door 전. 2003년 12월 1회를 시작으로 2005년 5회까지 이어졌던 전시는 이후 2년 동안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삼덕동의 분위기 변화가 분명 이유였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행사를 치루면서 돌발되었을 문제들 때문이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전시를 기획했었던 설치미술가 손 귤(40)은 한번쯤 만나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던 그녀가 나타났다. 그것도 제 6회 아웃 도어 전을 가지고.

“피 철철 흘리다가 죽기 직전에 발 뺀 거다. 돈 생기는 것도 아니고 참 좋을 것 같아서 그냥 한 건데 해 보니 기분 좋았다. 잘된다고 소문이 나면 날수록 더 심한 말들이 날아올 수 있다. 방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욕도 배 따고 들어오더라. 아프더라. 칭찬은 고래도 웃게 한다지만 악담은 욕도 배 따고 들어오더라. 많은 사람들 중에 고작 몇 명이 그랬던거 가지고 나 혼자 아팠던 거 같더라.”


그녀에게 듣다, 아웃도어 전
설치미술가 손귤(40)
설치미술가 손귤(40)
“"80년대에, 황현욱 선생님이 이런 일들을 하셨다는 것을 들은 적은 있었다. 건물 벽면, 길의 모퉁이, 길에서, 숨어있는 어떤 곳들에서 전시하는 기획을 하셨다는 이야기. 그때 당시 대학교를 갓 졸업한 지금의 선배들 작품을 전시하셨다."

"아웃도어를 단순한 전시계획의 형태로 보는데, 내가 생각할 때는 하나의 미술 운동이다. 이제는 미술도 좀 인문학적으로 접근할 때가 되지 않았나. 수필이나 소설이나 시나 글쓰는 사람만 인문학과 관련된 거 아니지 않는가. 노래하는 거나 그림 그리는 거나 글쓰는 거나 뭐가 다른가. 네, 다섯 자매들 아니가? 우리가 뭐 럭셔리한데? 배고파 죽는데.


한 이년동안 중증 장애아들만 있는 곳에 가서 같이 놀았었다. 농사짓는 친구들한테 쌀 좀 대라 하고, 애들 밥해 먹이는 동안은 나도 밥은 안 굶었다. 그리기에서 절대적인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을 보면서, 같이 나누면 좋겠다, 그 정도로 생각했다. 예술의 사회화라는 것은 너무 거창하고, 지금 예술이 너무 높게 가 있고."

“갤러리 안과 갤러리 바깥에 대해, 그러니까 미술인으로서 갤러리 안을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갤러리를 배제하고 움직이는 거다. 그곳은 너무 높다. 마치 중세 때 성 안에 사는 사람과 성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미술에서 성 안사람이 아니다.”


2년의 공백, 그리고 다시. 경주 갤러리 로하스, 9월 말부터 In or Out전
“경주에 있는데, 전화가 자꾸 왔다. 어떤 단체에서 하고 싶다 길래 하라고 했다.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지, 꼭 나일 필요가 뭐 있나. 그런데, 계속 전화가 오고, 내가 해야 한다고 그러더라. 해야 하나?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웃도어를 사업 마인드로 시작하려고 하더라. 그런 놈들 트럭으로 백대쯤 와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 하는가.

“경주에 아트 스페이스 로하스라는 공간이 있다. 원래는 전시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공간이었는데, 놀리고 있었다. 이야기만 만들어 달라 해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난 8월 15일부터 기금 마련 소품 경매를 하고 있다. 9월 말부터 진행할 전국 6개 도시 작가전 진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매 행사다. 이날 경매 물품은 모두 선배들, 작가들이 무료로 내준 것이다.”

경주 로하스에서 열린 전시.경매
경주 로하스에서 열린 전시.경매
"그것을 팔아서 조금씩 돈이 모이고 있다.
가을이 되면서 설치작업 주문이 많아지고 있으니까 그것도 모으고, 11,12월 달 까지 계속 경매를 진행해서 비용을 모을 것이다.

그곳에서 9월 29일부터 ‘In or Out전’ 이라는 이름으로 리그전을 하면서 12월에 있을 아웃 도어 전 작가 12명을 추려 낸다.”



"1회 때는 80만원 가지고 했다. 2회 때는 120만원. 그랬었다. 지금은 모든 행사가 줘도 미운 행사들 아닌가. 기획서를 뭐 같이 뿌리고 하면 안 켕길 수가 없다. 이천만 원 짜리 행사를 하려면 오천만 원 짜리 기획서를 써야 이천만원이 나오는데, 그러면 오천만원을 영수증 정산 하려면 일단 그만한 일을 해야 되거든. 그러면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고.

거짓말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전부 우리가 몸으로 뛰어서 하는 일들인데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지. 내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돈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웃도어 행사는 어쨌든 간에 올해부터 자생한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지금 하려고 하는 아이들이 하는 것이고 나는 지금까지 해 왔던 데이터만, 그것만이다. 내가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6회 아웃 도어
“6회 아웃 도어는 중구 공평동 신 피부과 골목이다. 삼덕동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운치 있던 골목이 포장마차 들어서면서 난리가 나고, 좋은 가게들 하나 둘씩 사라지고, 대형 건물 들어오는 건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거였고. 한사람이라도 팔자 폈으면 됐다. 죽을 때까지 먹고 살만큼 벌었다 그러거든.”

“아웃도어를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전시를 하면서 아트 상품을 찍는다. 그것이라도 유통을 시켜야지 전시를 자생시킬 수 있다. 자리가 잡히면 한 작가의 작품으로 앞으로 대량 생산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돈이 나오면 그런 비용을 모아서 전시를 하고 또 상품을 만들고, 예술이 문화로 안착되기 위해서는 창작, 향유, 소비의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지 단 몇 명이라도 좋아진다. 한명 먹여 살리던 거 두 명 먹여 살릴 수 있고, 두 명 먹여 살리던 거 네 명을 먹일 수 있다. 일단 가야지, 가 봐야지, 이런 식으로 하니까 적은 돈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들이 동의하는 것만 한다. 전혀 소리가 안나는 것으로 진행해야 한다. 한사람이라도 싫으면 안한다. 예전에는 돈 없이 아트북을 만들고, 팔리면 인쇄비 메우는 데 바빴다. 이제는 그 돈이 만들어 지면 상품을 만들고, 팔아서 계속 세이브만 시키면 된다. 지금 내가 고민하는 것은 전업 작가가 자급자족 할 수 있는 것이다.”

“영 아티스트 12명의, 일종의 머리 얹기다. 예술학과 라는 것이 학부에 생기고, 예술경영이라는 것도 대학원에 생기고, 지금 전부 초기 단계이다. 그 공부하는 친구들이 기획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기획이라는 것도 연습하는 곳이 필요하다. 행사가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늘 하던 사람들이 하잖아.


내 나이 불혹, 신은 나를 망가뜨릴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다
“결혼했었고 이별도 해 봤다. 작업을 할 비용 벌려고 사업해서 성공해 봤고 실패도 해 봤다. 저사람 왜 안 죽나 하더라. 살고 작업하려고 포장마차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배고프면서도 아트 한다고 똥폼 잡는 거 보다 훨씬 좋았다.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마흔까지 살다 보니까,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더라. 마음을 비워버리니까, 그러니까 열리더라. 내가 노력해서 되고 안 되고의 상황이 아니다. 나를 망가뜨릴려고 작정한 신이 아니다.”

“내 작업의 대부분은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 비우다, 투명하다 같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이 스크린처럼 다 지나갔으면 좋겠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데. 불혹, 생각 못했는데, 지금 몇 달 딱 남겨 놓고 보니 나 역시 불혹이더라.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차라리 죽도록 사랑해 보자
“떠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떠날 수 없더라. 갈려고 마음먹고 작정할 때 마다 뭔 일이 터지더라. 갈래야 갈 수 있는 상황이 안 나오니까, 그래 좋다, 죽도록 사랑해 보자, 여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못 배길 곳으로 만들어 보자 했다.

내가 나무인데, 땅이 척박해서 도저히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살 수가 없는 거라. 나무가 움직일 수 있는 놈이라면 물이라도 길러오고 비료라도 좀 뿌리고 할 텐데. 남의 논밭 부러워하면 뭐하나. 내 논밭이 자갈밭인데.

나 좋을 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토양 고르기 작업을 해야지 내 나이 예순쯤 되면 좀 안 낫겠나.


요즘 뜬다, 옥션. 작가들 살기 좀 나아졌나?

“작가와 아무 상관없다.
부동산 하고 같다. 10년전, 15년 전에 사들인 거 갖고 저거끼리 가격 올리기 하는 거. 땅 어디 딱 짚어 놓으면 요기 가격이 뜰 것 같잖아? 그러면 주민들 설득하고 회유해서 땅을 매입하고, 그러고는 주고받기 하면서 계-속 땅값을 올린다. 똑 같다. 그거하고.
작가하고 무슨 상관있나. 아무 상관없다. 작가의 작품이 팔리는 게 아니라 화랑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이 팔리는 거다. 돈 버는 것은 화랑들이지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여전히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사군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은 나아졌지. 예전에는 일반인들이 그 농작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일반인들도 기웃거리기 시작했으니 조금 살기는 나아졌지. 그래도 나는 옥션이 뜨면서 갑자기 집을 샀네 하는 작가들은 못 봤다. 그리고 대량으로 찍어내는 게 아니라 손으로 일일이 수공하는 작업인데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나. 하루에 몇 개나 그리겠나.”


화랑과 작가와 그림
중구 공평동 거리..
중구 공평동 거리..

“팔리면 뭐하나. 액자 값, 물감 값, 밀린 왜상 값 주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팔리면 뭐하나. 화랑이 반을 가지고 간다. 화랑 체제는 5:5다. 거기에 기획 값도 줘야 된다. 반반, 그러니까 반인 것 같아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우리하고는 정말 상관없다. 그런데도 아티스트 바보들은 당연히 성 밖에 있는 주제에 성 안에 잠시 외출하러 들어갔다가 성 안사람 된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거든. 나는 우리와 비슷한 주변에 대해서 돌아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 우리는 그다지 고급스러운 사람이 못 되고 고급 문화에 별로 안속해 있단 말이야. 그러면 나와 마찬가지인 이 쯤에서, 만나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정도의 사람들에서. 아웃도어 아무도 안보잖아. 부자들은.


단체와 개인
“나는 아직 현미협 회원이지만 그들과 나는 출발이 달랐다. 나는 회화로 출발한 사람이 아니다. 처음에는 염색을 공부했었다. 친한 선배 중에는 아직도 작업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직도 현미협 회원인 것은 나한테 어떤 계기를 제공했던 단체이기 때문이다. 원래 발족했던 그때의 창립 멤버들은 지금 거의 다 빠져 나갔지만 그 사람들은 내가 지금 현미협에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른다.

어떤 친구는 ‘귤아, 네 작업은 참 마음에 드는데 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참 마음에 안 든다. 근데, 니가 거기 있으니까 나는 참 싫다’ ‘빠져 나와도 안 되나?’ 그러기도 한다. 집단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개인에게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나에게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 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내가 그곳에 있어서 나한테 도움이 된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계기를 제공했던 단체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류혜숙문화시선 31]
글.사진 평화뉴스 류혜숙 문화전문기자
pnnews@pn.or.kr / archigoom@naver.com



(이 글은, 2007년 9월 27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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