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친숙해진 그림이라서 그런가, 노무현-김정일의 악수는 김대중-김정일의 포옹처럼 국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도 각별한 충격을 주지도 못한 것 같다. 당연히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대통령 내외가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는 장면 혹은 그 밖의 어느 광경에서든 분단의 비극과 얽힌 각자의 체험을 돌아보며 모종의 감동과 회한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주관적 감회보다 중요한 것은 100조를 훨씬 웃돈다는 경협효과와 평화체제의 정착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는 그 실질적 성과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과가 대다수 국민들의 일상에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부인하고 싶어도 대선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정치권만 아니라 국민들도 남북관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
"경협 위장 퍼주기?...'반통일 보수' 목소리 커질수록 통일비용도 늘어난다"
이번 정상회담은 꽤 오래 전부터 뜸을 들여왔고, 정치권은 각자 나름으로 대선과 관련지어 득실을 계산해 왔다. 또 득실에 비춰 회담의 성과를 깎아내리거나 추켜세우는 것도 정치권의 생리상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경협 위장 퍼주기” 따위의 선동으로 평화통일의 큰 흐름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좀 더 효과적인 경제논리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편이 “경제대통령”이라는 시대적 요청에도 어울리고 득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남북경협은 누가 집권하더라도 정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진전해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원하고 있고, 무엇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남한도 예산하기 어려운 잠재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탈냉전시대에 냉전 유물인 반공이데올로기로 정권안보를 위해 남북의 긴장관계를 이용해 먹기도 예전처럼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친북 좌파” 타령을 늘어놓다가는 이제 얻는 것 없이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일 것이다.
그렇다고 벌써 통일까지 탄탄대로가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한 내부의 갈등이 만만하지 않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들의 부정적 반응은 이미 예상된 바다. 정상회담 혹은 경협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남북긴장을 다시 고조시키려는 세력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통일비용도 증대할 것이다.
"사회 양극화...통일과정의 사회질서가 더 중요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민족문제의 세계사적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분단이 만악의 근원은 아니며 통일이 만병통치약도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은 분단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뿐만 아니라 경협과 통일의 수혜가 주로 누구에게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경협의 규모나 통일의 진전과 별개의 사안이다. 국가 전체가 부강해진다고 해서 국민들 각자가 행복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 경제의 급성장과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을 보면, 경협을 통한 경제성장 논의에 매몰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 중국이 아직 타이완과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성장이 미미해서 극단적인 양극화의 길로 치닫는 것은 아닐 것이다. 통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을 위해 통일과정에서 어떤 사회질서를 이루어내느냐 하는 문제다.
통일의 길과 관련해 독일의 역사에서 배울 부분이 있어 보인다. 19세기 초까지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식적인 틀 속에 수백 개의 군소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백성들은 수백의 군주들에게 유럽 어느 나라의 국민들보다 더 가혹하게 착취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국가를 추구하는 것은 당대의 봉건지배체제에 맞서는 반체제였다. 그 무자비한 군주들은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고, 이와 더불어 유서 깊은 신성로마제국도 무너졌다. 이후로도 독일지역은 여전히 40개가량의 군소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1871년 독일 통일, 경제적 욕구에 따른 위로부터의 통일...비극의 길"
나폴레옹의 침략을 계기로 학생들의 전국조직인 부르셴샤프트가 결성되어 통일운동을 주도했으나,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할 때면 우리의 전대협이나 한총련처럼 가차 없이 탄압을 받았다. 당시의 지배세력인 제후나 영주들은 지역적 패권에 만족하고 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1848년 3월 혁명 중 맑스는 각국의 민주화에 기반을 두는 통일국가 건설을 외쳤다. 허나 이러한 노선 또한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통일운동은 봉건지배세력의 탄압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독일 통일의 원동력은 경제였다. 산업혁명 과정에서 독일의 봉건지배세력은 자본가들로 변신해갔고, 이들은 경제적 욕구로 인해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게 되었다. 이들을 상징하는 인물이 비스마르크였다. 1871년의 독일 통일은 자본가로 변신한 봉건지배세력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통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의 민주적 요구는 묵살되고 군국주의적 팽창정책과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세계사적 비극의 길이 훤히 열렸다.
"우리 사회 내부의 차별...양극화 극복, 경제민주화 같이 가야"
분단에 희생된 무수한 영령들 앞에서 통일의 당위에 대해 누가 토를 달겠는가. 더구나 통일이 경제에도 보탬이 된다는데 어찌 감히 시비를 걸겠는가. 허나 백두에서 한라까지 누구나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절대다수 국민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차별과 불평등이 기승을 부리도록 놓아두는 한 통일도 요원할 것이다.
이제 누가 집권하든 노골적으로 반통일 정책을 끌고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우리 사회 내부의 차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통일은 다시 갈등과 분열로 이어질 것이다. 통일이 대다수 국민들의 일상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남북통일과 동시에, 혹은 그 이전에 양극화의 극복 내지 경제민주화가 진척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이 이 양대 과제 해결의 발판이 되리라 본다.
[홍승용 칼럼 34]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0월 8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