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지게 먹이던 시장통, 그 인심이 그립다"

평화뉴스
  • 입력 2007.11.1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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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정
"뻥튀기에 설탕물 호떡..나는 오늘도 장날을 기다린다"


어릴 때 우리 집은 대구에서 제일 크다는 서문시장 언저리에 살았다.
나는 시장이 참 좋았다. 밥집 커다란 솥에서 김이 물물 피어오르고, 오전 품을 판 일꾼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돼지 껍데기에 막걸리라도 들이키는 날이면 지나가던 거지도 한 그릇 푸짐하게 상을 받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누추한 거지를 불러들여 시래기국에 막걸리까지 곁들여 푸지게 먹이는 시장통 인심이 좋았다. 시장에서는 언제나 콩나물 오백원어치가 천원어치하고 양이 비슷했다.

추운 겨울날 할매들이 노천에서 자동차 매연을 마시며 다 불어터진 국수로 허기를 달래면, 가겟방을 차린 아줌마가 “할매요, 이거 잡수소.” 하면서 따뜻한 보리차라도 건네곤 했던 그 시장.

엄마가 장보러 가는 날에는 기를 쓰고 따라나섰다.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채이면서도 엄마 뒤를 악착같이 따라붙으며 장바구니 시중을 들다보면, 시원한 우뭇가사리 콩국이나 꺼먼 설탕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떡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등받이도 없는 긴 의자에 앉아 밀가루가 더 많은 뜨거운 야채만두를 김 후후 불어 가며 먹는 그 맛이란!

장보러 나온 사람들이 장사꾼과 주거니 받거니 흥정하는 걸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엄마가 정말 ‘택도 없는’ 값으로 물건을 사려들 때는 상인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흥정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청 높고 싱싱한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옷장수의 요란한 호객행위가 뒤섞인 어수선한 시장은, 참말이지 우울할 때면 나를 달래주는 위안이기도 했다. 거기에 가면 사람 냄새가 났고 가난한 생활의 활력이 있었다.

화원시장 자전거병원...'병원장' 아저씨는 60년대 이 간판을 직접 써 4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화원시장 자전거병원...'병원장' 아저씨는 60년대 이 간판을 직접 써 4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시장의 활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형할인매장이 동네마다 들어서서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차를 끌고 나온 가족들이 대형할인매장에서 ‘카트기’를 밀며 ‘쇼핑’하는 것이 생활문화로 자리 잡은 지금. 그나마 남은 재래시장들도 살아남기 위해 옛날 때를 벗고 점점 더 화려한 포장을 해간다. 번쩍거리는 간판과 시멘트 구획으로 시장은 더욱 반듯해졌건만, 시장은 갈수록 허전해진다.

우리가 냉동식품과 깔끔하게 잘 포장된 야채를 카트기에 담을 때, ‘웰빙’을 찾으며 수입품 유기농 매대를 기웃거릴 때, 쪼글쪼글한 할매들의 인심과 손수레를 끌며 “사려~” 외치는 장사꾼의 목청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논밭과 텃밭을 살리는 시장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그나마 내가 살고 있는 달성군 화원읍에는 ‘오일장’이 살아있다.
화원 오일장은 옛 시장만큼 크진 않지만 천막을 치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꾸준히 모여든다. 오일장이 들어서면 유모차를 밀거나 바퀴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나온 사람들로 온 동네가 흥성거린다. 장 대목에 동네 화원시장 상인들도 들떠서 바삐 움직인다.

나도 꼬맹이들을 데리고 괜히 살 것도 없는 장터를 어슬렁거린다.
과일장수들이 맛보라고 깎아놓은 감이나 귤도 집어먹고, 허연 연기를 뭉글뭉글 게우며 “뻥!”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뻥튀기도 맛보고... 장터에는 여전히 사람 사는 재미가 있다.

나는 오늘도 사야할 품목을 적어두면서 장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옛날 시장에서 안기던 따뜻한 사람 내음을 그리면서.


[주말 에세이 57]
글.사진 이은정(전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화원시장 뻥튀기 아저씨..
화원시장 뻥튀기 아저씨..


달성군 화원읍에는 아직도 5일장이 열린다.
달성군 화원읍에는 아직도 5일장이 열린다.


(이 글은, 2007년 11월 2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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