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양 있다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 말의 영어식 표현을 직역하면 문명화되었다는 말이다. 문명화되었다는 말은 보기 보다는 매우 복잡한 말이다. 서구 사람들이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서구사회가 이룩해놓은 서구 문명의 틀에 포섭된 상태만을 일컫고 있다. 서구 사람들이 말하는 문명화는 서구 문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비서구사회는 그 자체가 달성한 문명의 위대함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미개한 사회로 전락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서구중심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의 사고의 핵심은 바로 문명화 혹은 교양이라는 말에 그대로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논의를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회고하면서 스스로 ‘교양이 없는’ 대통령이었다라고 한 말을 떠올리고 있다. 며칠 전 이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묘한 기분을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교양없음'과 '진정성'
어떤 사람이 스스로 교양 없다고 말 할 때 그것은 용서를 빌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 말을 핑계 삼아 다른 무엇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교양 없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하고 싶었던 말은 어찌되었든 진정성 하나만은 국민이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냐 싶다. 참여정부 들어 가장 빠르게 일상화된 말 가운데 하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고백조로 말한 교양 없다는 말과 참여정부가 국민을 설득시킬 때 빈번하게 사용한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완벽한 댓구(對句)를 이룬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하여 참여정부의 반교양적인 행태는 이른바 8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이른바 386 정치세력의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이러한 표현에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일반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일 뿐 개별적인 평가는 아니니 오해는 말라). 우리 누구나 알고 있듯이 80년대 초반 광주사태를 비롯하여 당시 기성세대의 위선적(僞善的)인 행태는 가히 극단을 달리고 있었다.
그 광기어린 위선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분노와 좌절을 위악적(僞惡的) 행동의 선택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폭력과 파괴적 행위마저 서슴치 않았던 위악적 행동은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 그 위악적 행위는 386 정치세력의 반교양적인 경향성을 잠재화시키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부패한 위선적 정치세력'과 '반교양적 위악의 정치세력'
참여정부는 80년대의 그 불가피한 위악적 공격성과 반교양적 경향성을 개혁성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고 그러한 태도를 옹호하였다. 이 때문에 참여정부는 끊임없이 개혁조치의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진정성을 사람들에게 설득시켜야만 하는 개혁적 조치가 힘을 받아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불 보듯 뻔 한 이치. 사람들이 참여정부에게 느낀 피로감의 본질은 사실상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를 개혁피로증이라고 이름 붙이지만, 그보다도 진정성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킬 수 밖에 없었던 그 위악과 반교양적 태도가 사람들에게 피로증을 야기시킨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돌이켜보면, 80년대의 노도질풍의 시대를 거치고 90년대의 IMF 경제위기를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는 위선을 극복하는 방식이 반드시 위악적 행동을 앞세워 해결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아마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돈과 권력의 추악함을 감추고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해 동원된 교양 있는 삶의 방식의 허위의식을 반드시 싸가지 없는 공격성에 의존하여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어찌되었던 사람들이 참여정부의 위악과 반교양에 점차 불편함을 느끼고 피로감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참여정부가 끝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 사회는 위선과 위악의 두 가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강요받고 있다는 점이다. 위선의 정치세력은 부패하였고 냉전 수구적 사고에 사로잡혀 세계사의 큰 흐름을 놓치고 있다. 위악의 정치세력은 개혁성을 전면에 내걸고 있으나 반교양적이며 싸가지가 없는 집단으로 무능함을 표식으로 달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판단하자면 사람들은 부패한 위선적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반교양적인 위악의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거두절미 비토하는 매정함을 보이고 있다.
"참여정부의 실패...개혁 조치의 실패보다 반교양적 태도에 따른 소통의 무능함에서 비롯"
그러다보니, 위악의 정치세력이 내세우고 있는 개혁의 약속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위악과 반교양적 태도만이 표적이 되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위선의 정치세력의 냉전 수구적 사고 방식과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점으로 다가서지 않는다. 오로지 이들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의 부패의 정도가 금도를 넘어섰는지가 유일한 관심이다.
반교양적 정치적 세력에 대해서는 퇴장을 의미하는 레드카드를 분명히 꺼내 든 대신, 부패한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경고만을 주고 말지, 옐로카드를 꺼내들지 혹은 레드카드를 보일지 고민하고 있는 축구 심판 모습이 대통령 선거를 앞둔 현재 우리의 거울이다.
지금 한국에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개혁 주도 세력이 아니라 반교양적 정치 세력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선택은 반교양적 정치세력에 대한 반동이라고 해야 할 뿐 보수 반동이라고 볼 당위성은 없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이런 점에서 보면 개혁 조치의 실패에 있다기 보다는 반교양적 태도에 따른 소통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현재 반교양적 정치 세력이 퇴장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 공백을 소통을 중시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는 합리적이고 개혁주도적인 정치 세력이 메워 나갈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가 개혁 피로증에 걸렸다고 속단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개혁 피로증에 걸린 사회는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김영철의 경제 읽기 14]
김영철(계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kimyc@kmu.ac.kr)
1959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철 교수님은,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부터 계명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교육부 정책자문위원과 [대구라운드]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위원과 [대구경북지역혁신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방분권과 내발적 지역경제론](2005), [지역은행의 역할과 발전방안](공저, 2004)과 [자본,제국,이데올로기](공저, 2005)를 비롯한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1월 26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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