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21세기를 맞는 것이 아니라, ‘지식정보화’, ‘세계화’, ‘탈냉전화’ 등, 시대가 크게 이행하고 있다며 그 역사적 이행의 본질과 의미를 바로보자고 목청 높여 외친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낡은 사고와 문화와 제도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의식과 문화와 제도로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며, 우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 분주하게 애쓰기 시작한지도 꽤 여러 해가 지났다.
필자가 그런 일을 지식인의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틈틈이 이 일 저 일 벌여가며 또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면서, ‘역사적 통찰’과 ‘성찰’과 ‘거듭나기’를, 요즘 유행어로 ‘혁신’을 소리높여 외쳐 온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런 일들이 애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해 뛴다고 우리의 의식과 문화와 제도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길게 호흡할 필요가 있다. 쉽게 지치지 않으면서 뚜벅뚜벅 나아가는 끈질긴 자세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기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힘이 빠지기도 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20세기, 아니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들은 수도 없이 많다. 여기서는 최근 필자를 특별히 슬프게 만든 다음의 세 가지만 지적해 보고자 한다.
"경제 위한다며 경제 뿌리부터 썩게 만드는 왜곡된 논리"
첫째는 우리나라의 ‘대표기업’ 삼성을 둘러싼 갖가지 의혹과 추문이 폭로되고 있는 것과 관련된다.
물론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검찰 수사(얼마나 용기있게 파헤칠지 모르긴 하지만)와 앞으로 있을 특검 수사에서 밝혀져야 할 의혹 단계이긴 하지만,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의 고발과 폭로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글로벌기업이라는 삼성이 불법으로 경영권 세습을 꾀해 왔고, 역시 불법적인 방법으로 엄청난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하였으며, 그 돈을 사회 각계 지도층에 뿌려대면서 삼성독재의 사회를 구축해 왔고, 심지어 거짓으로 중앙일보와 계열분리한 뒤 그 중앙일보를 무기로 여론을 호도해 왔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한심하고 맥 빠지는 일인가? 그런 관행이 IMF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다며 그것을 바로잡겠다고 법석을 떤 것이 벌써 10년인데, 아직도 우리는 IMF 외환위기의 원인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럼 우린 그동안 무엇을 해 왔던 것인가?
사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속상한 일인데, 그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권과 법조계, 기업계와 일부 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왜곡된 인식과 관점은 더더욱 필자를 힘들게 한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국민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삼성을 위축시키는 그런 수사를 하면 어떡하느냐는 인식 말이다. 답답한 일이다. 도대체 경제를 위해서라면 ‘만인의 법 앞에 평등’이라는 18세기 이래 근대국가의 제 1 명제마저 팽개쳐도 괜찮다는 것인지, 법 위의 경제와 초법적 기업은 도대체 어떤 경제고 어떤 기업인 것인지, IMF 외환위기를 초래했고 그래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던 경제와 기업 경영 패러다임이 바로 그런 경제와 기업 패러다임이 아닌 것인지, IMF 외환위기의 재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옛날 경제와 기업 패러다임을 그대로 갖고 가자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투명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는 영역이 바로 경제 영역인데, 그런데 어찌 경제를 위해서 불투명한 것도 너무나 불합리한 것도 그대로 덮어두고 가자고 하는지, 그 경제론은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경제론인 것인지,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자세를 갖고는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를 위한다며 정작 경제를 망치는, 경제의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게 만드는 논리가, IMF 외환위기의 비극을 몸서리치게 겪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은 신기할 정도다.
"아직도 승공-멸공 들이대는 저 무모함"
둘째는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낡은 인식이 터무니없이 되살아나고 있는 요즘의 세상 분위기와 관련된다.
그것은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봤고, 북미간의 긴장에 기인한 수차례의 전쟁 위험을 무사히 넘겨온 우리 한반도에서, 그리고 그동안 값비싼 혼돈과 갈등 비용을 치른 뒤 이제는 탈냉전 세계질서에 우리 한반도도 힘들게 안착해 가는구나 하고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할 요즘에, 갑자기 뛰쳐나온 1970년대식의 냉전 회오리를 말한다. 힘들게 여기까지 온 남북 교류-화해-협력 분위기를 깨고 다시 하나하나 옛날로 되돌려 놓겠다는 저 대책없는 무모함이다.
남북교류-화해와 개성공단 확대를 주장하는 한 대선 후보에 대해서, 그가 적화통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식의 마타도어가 바로 우리 대구지역에서 스스럼없이 운위되고 있는 사실을 필자는 주목한다. 1인당 GNP가 1천 달러도 안되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이가 속출하는 북한이 2만 달러의 남한을 적화통일할 수 있다고 믿는 저 무대뽀 계산, 경쟁자가 아무리 밉다 하더라도 1950년대의 승공-멸공 논리를 들이대는 저 무모함,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눈감고 산다 해도 어떻게 저 정도일 수 있을까 생각될 만큼의 폐쇄적 세계관이 특히 우리 지역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동문 후보 선거운동 밀어붙이는 고려대 동문"
셋째는 고려대학교 동문들의 구태와 관련된다.
고려대학교라면 대표적인 명문 사학 아닌가?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우수한 신입생들을 받아 가르치는 그런 명문 사학 아닌가? 그 졸업생들이라면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지도급 인사들 아닌가? 그런 고려대학교의 졸업생들이 교우회보를 통해 누가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실상 동문 후보의 선거운동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으니, 이 또한 어찌된 영문인가? 선관위의 경고를 받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고 있으니, 진정 이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이 맞고, 과연 명문 사학이 맞는 것인가?
동문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것이 소원인 수준의 대학이 이 나라의 명문사학으로 자처하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못 들어가서 난리이니, 이 나라가 2007년이 다 저물어 가는 지금 이 시간에도 19세기와 20세기의 낡은 패러다임이 판치게 된 것도 실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낡은 패러다임, 기어이 새 패러다임에 자리 내주고 말 것"
필자는 우리 사회가 2007년을 2007년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못한다 해도, 지난 2002년의 대선을 거치고 그 후 5년을 살아오면서, 아무리 인색하게 계산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2002년은 넘겨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일각은 지금 이 시간에도 1970년대에, 또 어떤 곳에서는 1950년대에, 심지어는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그런 낡은 세계관과 패러다임이 청산되지 않은 채 맹위를 떨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5년 동안 대한민국을 경영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필자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던 것인지,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어깨에 힘이 주욱 빠지면서 세상이 슬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믿음과 희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전환의 폭이 넓고 깊이가 깊을수록 혼돈과 뒤죽박죽도 클 수밖에 없지만, 빛이 결국엔 어둠을 이겨 내듯이 낡은 패러다임도 새 패러다임에 자리를 내주고 말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낡은 패러다임을 청산해 내려고, 그래서 기어이 미래를 열어 내려고 사심도 계산도 밤낮도 없이 뛰는 이들이 적지 않기에, 결국 우리 사회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설계하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믿는다.
낡은 시대의 유령들이 어이없게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고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서성이며 으르렁대고 있지만, 우리의 헌신과 노력으로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필자는 확신해 마지않는다.
[홍덕률의 시사칼럼 73]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 홍덕률 교수는 <대구경북분권혁신아카데미> 원장과 <대구사회연구소> 소장, 대구대학교 <시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 <평화뉴스> 창간 때부터 <홍덕률의 시사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2월 2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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