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 비춰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벌어질 때에는 그 상식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닌지 의심해볼 만하다. 이제까지 이명박 후보처럼 끝도 없는 비리 의혹과 천박한 발언으로 국민들의 자괴감과 경멸감 혹은 상대적 우월감을 유발한 후보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높은 도덕성과 인품을 대통령의 기본자질이라고 믿어왔지만 그것은 상식이 아니라 허황한 집단망상이었던가? 부패해도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해괴한 민심이 어느새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을 기세다.
"도덕불감증의 시대정신, 여권도 한몫"...정동영, 양극화 풀기 위해 뭐했나?
도덕성을 거론하면 정치판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냉소적인 반발에 부딪친다. 그럴 만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국민들의 돼지저금통만 털어서 선거를 치른 줄 알았더니 차떼기의 십분의 일 쯤 되는 검은 돈을 받은 바 있고, 그 업보 때문인지 삼성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어쩐지 당당하지 못해 보인다. 도덕불감증을 시대정신으로 만드는 데에는 여권도 한몫 했던 셈이다.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의 여론몰이 탓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스떼기를 했건 어쨌건 그래도 경선할 것 다 해서 선출된 거대 여당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대선 역사상 유례없이 초라하다. 당을 어떻게 해체하고 변신시키고 다시 합체해도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이런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무조건 정권을 바꿔보겠다는 국민들의 욕구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무엇보다 IMF 이후 더욱 극심해진 양극화 현상이 있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의 양산, 부동산 폭등은 험악한 민심의 가장 중요한 진원이다. 여당의 주역이었던 정동영 후보는 양극화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어떤 정치력을 발휘했느냐는 물음에 속 시원히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수생...국민 마음 못잡는 '권영길', 세풍.병풍.차떼기 '이회창'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은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하지만 민심은 별로 권영길 후보와 함께 가려 하지 않고 있다. 집요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저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후끈한 바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그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기성 정치를 앞질러 달려야 할 진보정당이 당내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대선 삼수 후보를 내놓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은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아직도 그냥 미래의 정치세력인가.
또 다른 대선 삼수생인 이회창 후보에게서도 어떤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을까? 물론 있다. 출마 뜻이 있었다면 경선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명박 후보의 낙마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사실상 경선을 깨버린 그에게서는 어떠한 원칙이나 명분과도 무관한 치유불능의 대통령병이 엿보인다. 세풍, 총풍, 병풍과 더불어 차떼기라는 불멸의 정치용어까지 탄생시킨 그에게서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이상 지난 시대정신이 발산되는 것이 보인다면, 이는 나만의 착시현상이려나.
문국현, 성공가도 달려 온 특유의 오만.독선...'정규직 확대', '비리 없는 경영' 매력
문국현 후보 역시 대통령병 환자로 분류하고 싶다. 잘 나가는 CEO자리를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했다는 그의 주장은 진부한 정치적 상투어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소리쯤은 할 줄 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 가도를 달려온 사람 특유의 오만과 독선으로 종종 기성 정치권을 많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없다면 이 번 대선은 너무 싱거울 것이다. 사람중심의 진짜 경제라는 말로 압축되는 그의 주요 공약들은 노무현 정부가 심각하게 의식하면서도 풀지 못한 양극화 문제를 상당정도 완화할 방안이 될 수 있어 보인다. IMF기간에도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고 정규직을 늘이면서 기업을 성공적으로 키운 실력 덕분에, 그는 공약들을 단순히 선거용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추진하리라는 기대감을 품게 한다. 대기업 CEO 답지 않은 검소한 생활과 비리 없는 경영도 그의 매력이다. 그래서 부패와의 전쟁을 누구보다 자신 있게 끌고 나갈 듯하다.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면 힘없는 사람들도 그럭저럭 참고 살 만한 선진 자본주의 시대가 다가올 것 같다.
이명박, 능력껏 해먹으면 된다는 뻔뻔한 시대정신?
이명박 시대가 되어도 100%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성장률은 오를 수도 있다. 부동산으로 재미 보는 사람들도 좀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반대여론을 무릅쓰고라도 그가 운하건설을 밀어붙인다면 돈 있는 분들은 2박3일 한반도 종단코스 운하관광을 즐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적당히 탈세하고 위장전입하고 자식들 위장취업 시켜 회사 돈 좀 빼돌려도 도덕적으로 주눅들 일 없을 것이다. 능력껏 해먹으면 된다는 뻔뻔한 시대정신이 양심의 노고를 대신해 줄 것이다.
시대정신은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물려줘도 덜 부끄러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때 아닐까.
[홍승용 칼럼 35]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1월 19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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