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비망록"

평화뉴스
  • 입력 2008.01.1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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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새해 첫 장에 소원이 된 다짐을 적는다. 나의 오만을 떨치며.."

새해를 맞이한다. 전에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적어도 내게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올 새해를 맞이한다. 옷을 두텁게 갖추어 입고 지묘 왕산에 올라 간절한 마음이 되어 소원한다.

'사람을 표준에 맟추어 배열하기 좋아하는 전문가적 잔재주에 대못질 할 수 있기를, 저의를 캐고 다니는 짓일랑 거두어들이고 사물을 사물로 관념을 관념으로 욕망을 욕망으로 꼭 그렇게만 보고 들을 수 있기를, 그렇다고 절대로 점잔 빼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하소서'.


소원성취를 위해 우선 내 속을 간결하게 드러내는 말솜씨를 다듬어야 하는데, 어떻게 말솜씨를 가다듬을까.

시간의 경과를 따라가며 떠오르고 사라지는 생각을, 그 중에도 머물러 맴도는 생각일랑 반드시 적어두어야지. 문법이니 논리니 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엎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듯이 나도 교육학 글쓰기의 띄어쓰기를 골백번 해야지. 미국 글 훔쳐보는 일 하지 않는다.

드러난 것을 살피고 살펴서 숨어있는 것을 체감하고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숨어있는 것을 말해야지. 뭐든 꿰차고 있는 듯 처신하지 않는다.


고급스런 공책을 사서 첫 장에 반듯하게 나의 소원이 된 다짐을 적는다. 그 다짐에 '인생비망록'이라고 제목을 단다.

2009년 새해 나는, 2008년 새해 같이 산에 올라 다짐하는 소원풀이가 아니라, 나의 인생 비망록을 읽는 섣달 그뭄의 한밤과 정월 초하루의 새벽을 즐길 것이다. 비망록 읽기를 하다보면 필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게 될 터이고, 그렇다면 나이 먹는 불안도 날려 보낼 수 있겠지.

나는 지금 매우 우울하다. 나는 30년도 넘게 몸담았던 경북대학교 교육학과를 탁월성의 인문적 환경이 되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 없다. 나는 참여연대를 그럴 수 있는 시민운동체로 움직이게 하는데도 두손을 접고 있었다.

'그 사람의 탁월성은 그 사람의 주변을 탁월하게 하는데서 빛이 난다'고 했는데, 나는 내 주변을 잃고 달랑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서 우울하다. 분명 혼자였기에 나의 직업병은 깊어질 만큼 깊어졌다.

남을 예사로 가르치려 들고, 뭐든 되는 것 혹은 안 되는 것을 판정하려 든다. 내게 대접이 소홀하면 엉뚱하게 세상이 잘못 되어 간다고 분통을 터트린다. 선생질 하다 생긴 병이고 '교육학' 교수가 되어 깊어진 병이다. 나는 이제 내 삶의 다른 곳에 몸을 담아야 할 처지이다. 그곳은 여럿이 함께 몸과 마음을 소진시키는 '곳'이어야 하는데, 두려움이 떠나질 않는다.

나는 우울하다. 우울증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인 줄 알았는데, 이제 나는 그 우울증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갖는 병인 줄, 다만 그것을 떠올리는 게 너무 참담해서 꺼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나의 새해는 우울증의 드러남을 살펴서 그 우울증의 숨어 있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하는 비망록으로 시작한다.
한 해의 시작과 마감이 비망록으로 채워진다면, 나는 혼자 탁월해지려는 오만으로부터 떨어저 나올 수 있겠지.
어째든 나는 내 우울증의 고고학을 시작한다. 고고학적 탐색이 나의 남아있는 나날이 되었으면 한다.

나와는 다르게 새해를 맞이한 모든 분들을 생각하며, 저마다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2008년이기를 기원한다


[김민남 칼럼 16]
김민남(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mnkim@knu.ac.kr )



(이 글은, 2008년 1월 1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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