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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엘리트의 낌새도 풍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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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평등.자주는 진보의 핵심가치..정의.불의 같은 대립항이 아니다"


서구식 숫자미신에서는 럭키세븐이 지존으로 군림해왔고 삼삼칠도 곧잘 튀어나오지만, 선거철이면 뭐니뭐니 해도 51처럼 짜릿하고 매혹적인 숫자도 없을 것이다. 51이라는 매직넘버 밑바닥에는 가난뱅이든 부자든, 착한 사람이든 사기꾼이든,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고 일정한 형식조건만 갖추면 누구의 표라도 공평하게 하나로 대접해주는 민주주의의 숫자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다수가 소수의 소중한 의견을 짓밟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고, 다수가 늘 최선의 답을 내놓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수많은 엘리트주의자들이 대중에게 불신과 저주를 퍼붓곤 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소수 엘리트들이 독선에 빠져 파국을 초래하는 일은 거의 역사법칙이나 다름없이 빈번한 일이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소수의 독단과 이에 따른 공공의 위기를 막는 데에 기여해 왔다. 아무도 그 못된 소수에 자신만은 넣고 싶지 않겠지만, 역사는 그럴 수 없음을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정치세력이 다수 대중과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일단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실패의 충격을 줄이고 성공으로 향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51% 바깥으로 몰아내야 할 집단인가"
그러나 대선 이후 민노당의 반성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반성의 칼날이 어쩐지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진통 끝에 힘들게라도 비대위 체제가 출범하여 그나마 다행이지만, 당 내부의 갈등과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어지럼증은 당분간 잘 해소될 것 같지 않다. 당원도 아닌 처지에 당 내부의 괴로움을 얼마나 이해한다고 뭐라 훈수두기 민망하지만, 그래도 진보정치의 굳건한 성장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건전한 시민의 욕심에서 나름의 희망사항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하리.

무엇보다 분당에 대한 논의는 최대한 빨리 끝냈으면 한다. 노선과 지향점의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분당해야겠다면 말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평등과 자주는 모두 진보의 핵심 가치들이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 정의와 불의, 혹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과 같은 대립항이 아니다. 두 정파가 처음부터 강조점의 차이를 서로 잘 알면서 일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작은 당마저 쪼개고 나면 진보에 표를 던지려 대기하고 있는 나 같은 유권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숙고해 주었으면 한다.

확실한 명분 아래 산뜻하게 뭉치고 싶은 조직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깨끗한 조직 내부에서도 핵분열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 또한 국민들의 진보지향성이 절반을 넘는다는 통계도 꼭 참조했으면 좋겠다. 진보세력이 하기 나름으로는 매직넘버 51도 먼 미래의 무지개가 아닌 것이다. 구미 당기고 현실성 있는 대안들로 대중들을 설득하면서, 기본적인 진보 가치들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정파나 세력들과 손잡고 외연을 넓혀가는 것이 그 현실화의 전제조건일 것이다.

의회주의를 건너뛸 작정이 아니라면 최소한 국민의 51%와 함께하며 그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가야 할 터인데, 이때 자주파 또는 평등파는 상대를 51% 바깥으로 몰아내야 할 집단으로 분류해야 시원하겠는가. 조금만 밖에서 보면 초록은 동색이 아닌가.


"외연을 넓히면서 진보가치를 지키는 두 가지 숙제"
대중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기 위해서는 당 일을 맡아 이미 희생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외부에서 보면 당권을 장악한 기득권세력)이 대중들을 향해 또다시 더 낮은 자세로 임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것이 주체의 자격조건 아닌가. 물론 낮은 자세를 취한다고 해서 진보의 가치들을 버리고 당의 중심노선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외견상 모순된 요구지만 외연을 넓히면서 진보가치를 지키는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풀지 않으면 전보정치의 미래상은 암울하게끔 되어 있다.

이럴 때 헤게모니라는 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헌데 헤게모니는 상대방의 자발적 동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뭔가 내놓을 카드가 그럴싸해야 성립된다. 그렇다면 가난한 진보운동가들이 내놓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하나는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을 같다. 진보를 위해 그 동안 자신이 치른 희생과 얻어낸 성과들을 마음속에 깊이 묻어두고, 어떠한 운동엘리트의 낌새도 풍기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현 시점에서 대중들의 실질적 요구에 더 많이 귀 기울이고 대중들의 허기와 갈증 해소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래야 어느 조직 혹은 계급의 패권주의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진보정치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진보라는 믿음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일할 때 얼마나 좋았는지를 잊는 것은 더 나쁜 일"

자신의 모든 기득권과 체면을 내던지고 헌신하려 달려들면 어쩔 수 없이 좀 더 너그러워지고 현명해질 것 같다. 그래야 진보내부의 차이들에 서로 과민해지지 않고 오히려 보수 속의 진보 가능성까지 끊임없이 발굴해내고 부추길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아니면 보수나 수구나 다 똑같다는 독선적 추상적 사고에서 훨씬 자유로워져서 공정한 역사적 판단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는 따뜻하고 정의로울 뿐 아니라 현명하기도 하다는 범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구동독 작가 아나 제거스는 꽤 괜찮은 소설 [일곱째 십자가]에서 이런 말을 한다. “놈들(파시스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짓을 잊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우리가 함께 일할 때 얼마나 좋았는지를 잊는 것은 더 나쁜 일이다.” 지금이 군사독재 시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이명박 시대 아닌가.


[홍승용 칼럼 36]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7년 1월 14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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