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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와 약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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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경제읽기]
"만병통치약, 차력사, 바람잡이, 참칭...뭐가 다른가?"

어릴 적 시장 어귀나 동네 공터에 잊어버릴 때쯤만 되면 한 번씩 나타나는 약장수를 기억하는가. 그들은 차력사의 시범을 통해 우선 사람을 끌어 모은다. 그리고는 이른바 만병통치약이라는 물건을 꺼내들고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공짜구경을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뒤돌아서면 봉변을 당할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말솜씨가 좋은 약장수의 속임수에 깜박 넘어가기도 해서 그들이 내미는 물건을 사고 만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구경꾼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지갑을 꺼내들고 돈을 지불하였지만, 막상 물건을 받는 순간 그들의 얼굴빛은 예외 없이 후회의 감정으로 심하게 흔들린다. 이제 이런 종류의 약장수는 노인을 상대로 밀실로 숨어들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거나 이중 일부는 태국의 방콕과 중국의 북경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유객행위를 벌이며 나름대로 업계의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다.

나 또한 이런저런 기회에 이런 물건을 속고 산 적이 여러 번이지만, 고백컨대 나는 이들 약장수가 떠안긴 그런 종류의 물건으로 약효를 보았기는커녕 포장을 뜯어보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즈음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이제는 동남아 관광지에서 간혹 마주치는 약장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든다. 약장수의 교언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다가도 뒤돌아서면 아차 속았다는 그 고약한 기분. 대운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약장수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운하, 만병통치약인가?

첫째, 만병통치약으로 선전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당장 내일 혹은 가까운 미래에 큰 병이나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지 모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사람의 관심을 끌어 모은다. 그 다음에 만병통치약인 그들의 처방을 내민다. 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환경도 개선하고, 홍수도 조절하고, 산업용수도 공급하고, 식수원 문제도 해결한다. 그야말로 만병통치약으로 한국사회의 국운을 바꾸는 비책이다.

그러면 국운이 달려있는 그 중요한 사업을 왜 이제까지 어느 정부도 추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을까? 몽매했기 때문이라고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그들은 다른 자리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이룩해놓은 위대한 성취를 극단적으로 찬양하면서, 유독 대운하 사업만을 가지고는 그러한 사업에 여태껏 눈 돌리지 못한 한국 사회의 몽매함을 꾸짖는다. 그들에게는 한국사회가 대운하 사업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선택지에서 기각되어 버린 사실을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우리사회가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대운하 사업과 관련된 논의가 제기된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며 대운하 사업의 추진의 당위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매번 그 때마다 그 사업의 타당성이 인정되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된 사실에 대해서는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운하 사업의 필요성을 검토하였다는 사실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고 있지만, 그렇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폐기처분한 결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놀랄만한 통찰력 혹은 위대한 지도력에 의한 결단이라고 떠받들어야 하지 않을까?


청계천 리더쉽?..."차력사 능력과 약장수 약은 별개"

둘째, 차력사가 등장한다. 약장수는 일상의 사람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괴력을 가진 사람들을 들러리로 내세운다. 그리고 자신이 내미는 물건을 사먹으면 차력사의 괴력은 아닐지라도 신비의 마법에 의해 사람들의 병을 치유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차력사의 능력과 약장수의 약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차력사가 약장수의 약을 먹고 차력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운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청계천의 성공을 내세운다. 청계천이 성공했기 때문에 대운하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차력사의 능력에 넘어간 사람들이 약장수가 내미는 물건을 홀린 듯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청계천의 성공에 도취된 사람들은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동참하여 함께 거든다.

청계천과 대운하는 물을 흘러 보낸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이 두 사업은 전혀 별개의 사업이다. 청계천은 예전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 위를 덮고 있던 복개도로를 거두어낸 것이라고 한다면, 대운하는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시키고 강바닥을 준설해서 배를 띄우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편익분석의 방식도 다르며 토목공학이나 환경공학의 적용 범위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운하 사업의 추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청계천과 대운하 사업의 본질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대운하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 믿고 있는 것은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청계천 사업을 성공시킨 리더십이다. 요즘 영화 ‘우리 생애의 행복한 순간’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있다. 리더십만으로 대운하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약체의 여자 핸드볼 팀을 이끌어 올림픽에서 믿기 어려운 성과를 이룩해 낸 영화 속의 안승필 감독이 현재 극도로 부진한 한국의 남자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되면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대운하 '바람잡이', 그리고 '침묵'의 의미

셋째, 바람잡이가 있다. 약장수가 끌어 모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끼어 있다 보면 약장수가 묻는 말에 누구보다도 빨리 대답하고, 내미는 물건을 재빨리 사서 주변의 남들에게도 권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조금 철이 들어 알아차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전이 파하여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 어느 순간 다시 모여 약장수와 한패 거리가 되어 움직이는 바람잡이이다. 바람잡이는 약장수가 파는 물건이 무엇이든 관심이 없다. 다만 약장수의 말과 행동에 추임새를 넣어 주위 사람들을 현혹시키면 그만이다. 바람잡이는 파장 이후 수입을 두고 벌어지게 될 셈법에만 온갖 신경을 곤두세울 뿐이다.

대운하 사업에도 바람잡이가 있다. 약장수의 바람잡이와의 차이점은 대운하 사업의 경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바람잡이 역할을 자임하는 사람이 많이 꾀여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운하 사업단이 만들어 놓은 논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대운하 사업의 실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무지하다. 그들은 대운하 사업 자체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무한 권력에 충성심을 보일 뿐이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셈법에 따라 대운하 사업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대운하 사업 자체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셈법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대운하 사업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온통 바람잡이 뿐이라는 사실이다. 정작 대운하에 물건을 실어 나를 화주(貨主)는 눈 씻고 보아도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현재 국제공항 터미널에서,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아니면 기차 대합실에서 바쁜 숨을 고르며 바람잡이만 구경꾼으로 모여든 우스꽝스런 촌극에 ‘썩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가사를 음미하면서 그들이 침묵하고 있는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타' 된 듯한 약장수...'환경론자' 된 듯한 토건주의자

넷째, 참칭(僭稱)에 능란하다. 약장수는 자신이 파는 약으로 생명을 치유하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스스로 저 유명한 전설의 명의인 화타가 되기도 하고 계룡산의 전설의 도사로 둔갑하기도 한다. 약장수는 화타를 참칭하고, 계룡산 도사의 화신으로 자칭하지만 전이 파하게 되면 사람들이 자리에 일어나 뒤돌아서기도 전에 재빨리 지갑을 열고 오늘 벌어들인 지폐를 세기 바쁘다.

대운하를 건설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언제부터인가 환경론자와 생태론자로 참칭하며 스스로를 미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는 정치공학자와 맹목적 토건주의자임을 누군들 모르랴. 그들은 입으로는 환경과 생태를 말하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다가오는 총선에서 확보할 표 계산과 변화된 정치적 지평 속에서 차지하게 될 발언권의 확대 전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경제학의 ‘경’자도 모르는 자칭 경제학자와, 4월의 총선전략에 바쁜 정치공학자와 맹목적 토건주의자들이 환경론자와 생태론자를 참칭하면서 진정한 환경론자와 생태론자의 발언권을 빼앗고 있다.

참칭에 능란한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토론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토론장에 불려나가서도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내뱉는 설교와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일만을 반복한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모든 논리는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라고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긴, 길거리 약장수에게 물어보아라. 세상의 모든 의사와 약사는 엉터리라고 거침없이 비난하면서 자신의 말이야말로 오직 길이요 진리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김영철경제 읽기 15]
김영철(계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kimyc@kmu.ac.kr)

1959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철 교수님은,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부터 계명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교육부 정책자문위원과 [대구라운드]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위원과 [대구경북지역혁신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방분권과 내발적 지역경제론](2005), [지역은행의 역할과 발전방안](공저, 2004)과 [자본,제국,이데올로기](공저, 2005)를 비롯한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8년 2월 4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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