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이 그려진 실용주의자

평화뉴스
  • 입력 2008.04.2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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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실력 갖춘 일꾼을 찾아내 존중하는..
그것을 캠페인하고 싶다"

내일 지구가 파멸한다고 해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도덕주의자에게 삶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파멸한다고, 그렇다면야 열려 있는 사과를 마저 따먹겠다는 실용주의자에게 삶은 얼마나 가벼운 것일까.

숭고의 미 말고는 사과나무 심는 삶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세속적 몸의 언어를 내세우는 실용주의자한테서 훨씬 진한 사람냄새를 맡는다.

지키지 못할 내율을 만들어 지켜려 애쓰다가 끝내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꼴이 보기에 얼마나 민망한가. 몸이 가는대로 내지러다가 어느새 탄식하며 몸을 가다듬는 일상의 모습이 차라리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실용주의자의 편에 선다

몸의 언어에 따르는 처신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누구든 사회적 압력을 받아들여 제 몸을 눕힐 자리를 찿는다. 그 때쯤 그는 말을 할줄 아는 몸이 된다. 몸을 한껏 움직여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동료 일꾼들을 연민하고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도록 이끌어 주는 아주 예민한 말을 할줄 아는 정신이 된다. 그 정신은 몸의 초월을 경험하는 반성력이다.

몸짓이 큰 사람들은 저마다 차이를 키우고 그 차이를 들어내어 균형을 이루는 질서를 이룬다. 그들은 이 자연스런 질서를 가지고 세상을 운용할 줄 안다. 그것을 두고 생활 정치,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하겠지. 무슨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장애우를 살리고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허풍떠는 잔머리 정치에 더 이상 기댈 필요가 없다. 그것 보다는 아이들 간의 차이를 키우는 교실을 구성하는 인류의 유적 능력에 주목하자. 능력이란 능력 있음을 남김없이 나타내 보일 때까지는 그것을 능력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능력은 실력이다. 잠재력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참가하여 몸을 바친 자가 실력 행사를 한다. 실력을 갖춘 일꾼을 찾아내어 그들을 존중하는 것, 그것을 캠페인하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은 몸을 한껏 사용한 사람이라고 믿기에 나는 그의 ‘논리없음’의 말과 거칠은 발걸음을 차라리 좋아하고 그의 말과 발걸음의 세계를 읽으려고 애쓴다. 나는 그가 국가원수로서의 처신이 부족하다는 점잖빼는 식자층의 충고 따위에 절대 주눅 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나는 그가 굉장한 성과를 올려 얻게 된 굉장한 대가에 맛을 들이다가 일하는 사람을 향한 연민과 기진한 몸의 휴식에서 우러난 성찰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근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돈내기’ 논리를 앞세워서 뒤처진 사람들을 후러치는 짓을 내심 즐기고 있을 터인데, ‘사람은 다 제 할 탓이라고’ 정신론을 펼치면서 말이다. 인생을 전략이라고, 일도 종교도 전략이라고 보겠지. 재산 모아놓은 것을 보면 또 종교를 아무데나 들먹이는 것을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재산을 헌납하겠다든지 청와대에서 예배보지 않겠다든지 하는 다짐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나는 그가 삶을 전략이라고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적 자세에 충격을 가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부디 그 풍조에 편승하고 그 풍조를 거드는 지도자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가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는 한국인에게 휴식의 그늘을 조금 만들어주는 정책을 펴주기 바란다. 무엇 보다 먼저 무거운 짐지고 수고하는 자들을 쉬게 해주리라는 예수를 진짜 찬미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기를, 종교를 전략 구사하듯 하는 교계의 풍조를 꾸짓는 모범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업적 이윤에 혼을 빼앗기고, 보편의 가치를 냉소하는, 목소리만 큰 사람들의 실용주의자는 이웃에 재앙을 불러온다. 이것을 경계하여 실용주의를 거듭 철학하자고, 그래서 실용주의 대신에 실험주의를 제창한 사상가가 있다. 그를 실용주의 완성자라고 한다.

이런 저런 것들이 달라붙어 하잖게 된 삶의 천박성을 구하는데 죽음의 커리큐럼만한 것이 없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냥 할 일을 마다 않고 하면서 병을 친구처럼 여기며 사는 일상을 택하기로 했다.’

삶이 전략이 되면서 교육이 전략의 희생물이 되었다. ‘엄중해야 마땅한 교육’이 너무나 가벼운 일감이 되어 버렸다. 멋대로 짜 맞춰 하는 것이 교육이 되어 버렸다. 실력 있는 교사가 한 둘이 아닌데, 왜 보고만 있을까.

[김민남 칼럼 17]
김민남(전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mnkim@knu.ac.kr )

내일 지구가 파멸한다고 해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도덕주의자에게 삶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파멸한다고, 그렇다면야 열려 있는 사과를 마저 따먹겠다는 실용주의자에게 삶은 얼마나 가벼운 것일까.

숭고의 미 말고는 사과나무 심는 삶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세속적 몸의 언어를 내세우는 실용주의자한테서 훨씬 진한 사람냄새를 맡는다.

지키지 못할 내율을 만들어 지켜려 애쓰다가 끝내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꼴이 보기에 얼마나 민망한가. 몸이 가는대로 내지러다가 어느새 탄식하며 몸을 가다듬는 일상의 모습이 차라리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실용주의자의 편에 선다

몸의 언어에 따르는 처신도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누구든 사회적 압력을 받아들여 제 몸을 눕힐 자리를 찿는다. 그 때쯤 그는 말을 할줄 아는 몸이 된다. 몸을 한껏 움직여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동료 일꾼들을 연민하고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도록 이끌어 주는 아주 예민한 말을 할줄 아는 정신이 된다. 그 정신은 몸의 초월을 경험하는 반성력이다.

몸짓이 큰 사람들은 저마다 차이를 키우고 그 차이를 들어내어 균형을 이루는 질서를 이룬다. 그들은 이 자연스런 질서를 가지고 세상을 운용할 줄 안다. 그것을 두고 생활 정치,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하겠지. 무슨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장애우를 살리고 지역을 발전시킨다고 허풍떠는 잔머리 정치에 더 이상 기댈 필요가 없다. 그것 보다는 아이들 간의 차이를 키우는 교실을 구성하는 인류의 유적 능력에 주목하자. 능력이란 능력 있음을 남김없이 나타내 보일 때까지는 그것을 능력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능력은 실력이다. 잠재력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참가하여 몸을 바친 자가 실력 행사를 한다. 실력을 갖춘 일꾼을 찾아내어 그들을 존중하는 것, 그것을 캠페인하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은 몸을 한껏 사용한 사람이라고 믿기에 나는 그의 ‘논리없음’의 말과 거칠은 발걸음을 차라리 좋아하고 그의 말과 발걸음의 세계를 읽으려고 애쓴다. 나는 그가 국가원수로서의 처신이 부족하다는 점잖빼는 식자층의 충고 따위에 절대 주눅 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나는 그가 굉장한 성과를 올려 얻게 된 굉장한 대가에 맛을 들이다가 일하는 사람을 향한 연민과 기진한 몸의 휴식에서 우러난 성찰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근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돈내기’ 논리를 앞세워서 뒤처진 사람들을 후러치는 짓을 내심 즐기고 있을 터인데, ‘사람은 다 제 할 탓이라고’ 정신론을 펼치면서 말이다. 인생을 전략이라고, 일도 종교도 전략이라고 보겠지. 재산 모아놓은 것을 보면 또 종교를 아무데나 들먹이는 것을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재산을 헌납하겠다든지 청와대에서 예배보지 않겠다든지 하는 다짐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나는 그가 삶을 전략이라고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적 자세에 충격을 가하는 지도자가 되기를, 부디 그 풍조에 편승하고 그 풍조를 거드는 지도자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가 삶의 무게에 힘겨워 하는 한국인에게 휴식의 그늘을 조금 만들어주는 정책을 펴주기 바란다. 무엇 보다 먼저 무거운 짐지고 수고하는 자들을 쉬게 해주리라는 예수를 진짜 찬미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기를, 종교를 전략 구사하듯 하는 교계의 풍조를 꾸짓는 모범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업적 이윤에 혼을 빼앗기고, 보편의 가치를 냉소하는, 목소리만 큰 사람들의 실용주의자는 이웃에 재앙을 불러온다. 이것을 경계하여 실용주의를 거듭 철학하자고, 그래서 실용주의 대신에 실험주의를 제창한 사상가가 있다. 그를 실용주의 완성자라고 한다.

이런 저런 것들이 달라붙어 하잖게 된 삶의 천박성을 구하는데 죽음의 커리큐럼만한 것이 없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냥 할 일을 마다 않고 하면서 병을 친구처럼 여기며 사는 일상을 택하기로 했다.’

삶이 전략이 되면서 교육이 전략의 희생물이 되었다. ‘엄중해야 마땅한 교육’이 너무나 가벼운 일감이 되어 버렸다. 멋대로 짜 맞춰 하는 것이 교육이 되어 버렸다. 실력 있는 교사가 한 둘이 아닌데, 왜 보고만 있을까.

[김민남 칼럼 17]
김민남(전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mnkim@knu.ac.kr )



(이 글은, 2008년 4월 7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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