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의원 총선이 끝났다. 결과는 여대야소였다. 과반 의석을 확보한 한나라당에 축하의 인사를, 그리고 목표로 내걸었던 자력(自力) 견제 의석 확보에 실패한 통합민주당, 17대 총선 때보다 크게 위축된 진보 정당에는 위로의 인사를 건넨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들에게는 축하를, 지금쯤 크게 낙담해 있을 낙선 후보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인사를 함께 드린다.
국민의 선택은 소위 ‘안정’이었다. 한나라당의 ‘안정론’에 유권자들은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뜻대로, 그리고 유권자의 기대대로 총선 이후의 상황이 안정으로 갈 것인지는 그리 간단치 않다. 꼼꼼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필자의 결론이다. 청와대와 정부에게는 안정일지 모르지만, 서민 생활과 사회와 국토에는 불안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대 최저 투표율... 국민과 국회사이 심각한 괴리를 의미한다
불길한 예감은 첫째, 46%에 그친 역대 최저의 투표율에서 시작된다. 유권자의 25% 지지, 심한 경우에는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지만으로도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국민과 국회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국회가 과연 민의를 제대로 수렴해 낼 수 있을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선거의 위기요, 민주주의의 위기인 것이다.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번 총선이 전체적으로 정책이 실종된 선거였다는데 있다. 대구경북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거부로 TV 토론마저 성사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출마한 후보들의 정책이 뭔지, 심지어 누가 나왔는지도 잘 모른 채 선거일을 맞았다. 전형적인 ‘묻지마 투표’를 강요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묻지 않고 던진 표로 당선된 이들이 지지자의 이익과 기대에 반하는 정책들을 쏟아낼 때, 정치의 불안과 사회갈등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힘을 받게 된 이명박정부의 성격도 불안을 예감케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현대 사회의 갈등을 예방하고 조정하고 해결하는 사실상 유일한 기제는 민주주의 절차라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의 성격이 민주주의와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는 생래적으로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기업 CEO 출신일 뿐만 아니라 별명이 불도저이기도 한 대통령,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승계한 한나라당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후퇴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며, 그것은 당연히 정치불안과 사회불안의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넷째, 앞의 세 가지 요인이 결합될 경우, 우리 사회의 불안과 갈등이 국회와 정치권 안에서 전개되고 해소되기보다는 정치권 밖에서 국가 대 시민사회의 대결 구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산업현장과 농촌 마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처절한 절규가, 거리에서는 각종 민원을 맨몸으로 호소하는 시위대의 저항이 일상화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시민사회의 고통과 요구가 정치권 안에서 수렴되어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보다는 정치권 밖에서 국가기구와 직접 부딪치는 결과가 예견되는 것이다.
불길한 예감을 드리운 18대 총선은 과거의 어느 선거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만만치 않은 숙제들을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던져 주었다. 몇 가지만 추려 보도록 하자.
299명은 국민의 무관심과 불신과 냉소... 겸허한 자세로 고민해야
첫째, 18대 국회의원이 된 299명은 자신들만으로 국민의 뜻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역대 최저의 투표율로 탄생된 18대 국회의 원천적 한계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국회가 수렴해 내지 못하는, 국회 밖에서 터져 나오는 국민의 목소리에도 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권 전반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과 불신과 냉소를 어떻게 소화해 낼지, 돌아앉은 민의를 어떻게 담아낼지, 국민의 뜻과 기대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기 위해서는 선거제도와 국회제도를 어떻게 혁신해 가야 할지, 겸허한 자세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둘째, 특히 집권 여당과 이명박정부는 과반 의석 확보 이면에 숨어 있는 국민의 엄중한 경고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이명박계열의 핵심 3인방, 이재오, 이방호, 박형준 의원의 낙선이 주는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이명박대통령은 관권선거 의혹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이재오의원을 지원했지만 낙선하였고, 이방호 사무총장은 강기갑 민노당 의원에게 고배를 마셨다. 이번 총선 최대의 이변으로 기록될 3인방의 낙선을, 청와대와 집권 여당은 뼈아픈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국민이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게 무한대의 권력을 용인해 준 것으로 오독해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영호남 한나라당 민주당 싹쓸이 한 셈...다시 불거진 지역주의 극복도 과제
셋째, 다시 불거지고 있는 지역주의를 어떻게 극복해 갈지 다시 차분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영남과 호남에서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 이들이 친박연대 혹은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바람에, 영남과 호남 모두에서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이 싹쓸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리고 내용상으로는 석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호남의 지역주의에 편승해 쉽게 정치하기보다는 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지, 책임있는 정치인들은 답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해 가야 할 것이다.
넷째, 정당정치, 정당개혁의 후퇴에 대한 고민이다. 몇 년째 어렵게 진척되어 온 정치개혁과 정당민주주의가 이번 총선을 전후해 크게 후퇴하면서, 정치권은 이를 다시 추동해 갈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제시해야 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후퇴시켜도 좋다는 생각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해 가는데 걸림돌일 뿐이다.
시민사회의 숙제, 여당독주에 따른 부작용 차단위한 프로그램 마련 고민해야
다섯째, 시민사회에도 만만치 않은 숙제들이 던져졌다. 거대 집권여당의 독주가 가져올 부작용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사회정의, 공동체연대, 교육정의, 중산층ㆍ서민의 복지, 소수자 인권 등을 지켜내는 힘겨운 일이 시민사회의 숙제로 던져진 것이다. 우선 가라앉아 있는 시민사회를 활성화하고, 달라진 정치 환경에서 시민사회의 정책을 정돈해 내고 힘을 결집해 가면서 정치적으로도 관철시켜 가는 프로그램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여섯째,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도 훨씬 막중해졌다. 정파적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인들이 국민의 이익, 국가의 미래, 국토의 환경, 후손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한 용기있는 실천에 적극 나서야 하게 된 것이다. 경제성장론과 실용론이 그 외의 모든 공적 가치들을 집어삼키는 상황, 그리고 청와대와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자치단체 의회까지를 한나라당이 석권한 사실상의 일당 체제가 가져올 가공할 사태에 맞서서, 정론을 지향하는 언론과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이 민주주의와 공적 가치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여당이나 야당 모두 선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4.9 총선에 담긴 국민의 주문과 경고를 함께 읽어 가면서, 299명의 18대 국회의원 모두가 오직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복리를 위해, 사회정의와 경제발전을 위해 지혜를 모아 주기를 간절히 염원해 마지않는다.
[홍덕률의 시사칼럼 76]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대구사회연구소 소장. drh1214@hanmail.net)
(이 글은 2008년 4월 10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