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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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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서울의 밤거리가 촛불로 뒤덮이자 머리를 조아리며 ‘반성’과 ‘사죄’를 입에 담던 정부가 다시 ‘엄정’이니 ‘강경’이니 하는 살벌한 단어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경찰의 실제 진압작전은 그런 말들보다 한참 더 살벌하다. 아무 저항도 못하는 여학생을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는 장면은 이미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현 정부의 반인권적 반민주적 본색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

우리 시대와는 별로 상관없을 것만 같던 80년대식 풍경들이 이제 매일 저녁 사방에서 펼쳐진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긴 하지만, 생업에 몰입해 있던 평범한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라 걱정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이든 시민들은 쉽사리 5. 18을 떠올리고, 젊은 네티즌들은 그 동안의 정치적 무관심을 자책하며 다음 선거 때 보자고 벼르고 있다.

헌데 그 동안 촛불의 위세에 숨죽이던 관변 논객들은 어떻게 해서든 색깔론을 끌어들이거나 촛불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소리치면서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켜 폭력진압의 핑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폭력진압으로 쉽사리 가라앉을 민심이 아니다. 여차하면 예측불허의 불길로 번질 수도 있어 보인다. 어쩐지 현 정부가 자꾸 감당할 수 없는 불장난을 하려 든다는 느낌이 엄습해 온다.

사태의 발단은 누구를 위한 정치이고, 누구를 위한 경제 살리기인지가 이미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 버린 데에 있다. 소수 특권층의 권익을 지키려는 정치집단도 표를 의식해 다수를 위해 일한다는 제스처라도 취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기본기다. 그런데 현 정부는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력만 아니라 경제적 본능까지 무시해도 좋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들을 쏟아놓았다. 미국 쇠고기 수입은 그 상징이다.

솔직성 자체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소중한 미덕이다. 이 점에서 현 정부는 본의 아니게도 우리 사회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이제는 정부가 어지간한 꼼수를 써도 이미 국민들은 그 정치적 본질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민영화’라는 말 대신 ‘선진화’라는 말을 쓴다고 안심하고 구경만 할 사람은 별로 없게 됐다. 문제는 수사법이나 홍보가 아니라 정책의 기본방향임을 국민들은 유례없이 명확히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촛불이 아무리 늘어나도 친재벌 반서민 정책의 기본방향은 조금도 흔들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불굴의 자세는 확실히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시할 수 없는 미덕이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유효적절하게 입장을 바꿀 줄 아는 상대를 대하려면 얼마나 까다로운가. 그런데 쓸데없이 그런 변화 따위를 기대할 필요가 없는지라, 이제 국민들은 마음 편하게 혹은 독한 마음 먹고 정부의 정책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됐다.

의료보험 문제를 소재로 다루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 [식코]는 세계 최강의 부자나라 미국 국민들이 영국인이나 프랑스인만 아니라 심지어 쿠바인들보다도 더 불안한 생존조건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의 경우 잘 나가는 전문직 종사자들조차 병원 한 번 잘못 찾았다가는 패가망신하고 거리에 나앉기 일쑤다. 절대다수 서민들의 건강과 목숨보다 극소수 보험회사들의 이윤추구를 더 존중해준 정책과 문화의 당연한 귀결이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무리 비대해져도,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이 군림하는 곳에 서민들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다.

국민들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것은 경제성장과 별개인 정책방향과 정치문화의 문제다. 설혹 경제 살리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더라도 현 정부가 서민들을 두려워하고 존중할 것 같지는 않다. 촛불의 배후 원동력은 바로 현 정권의 이 정책방향이다. 이를 스스로 바꾸지 못하는 한 촛불은 어떤 형태로든 끝없이 타오를 것이다. 경찰봉이나 물대포 따위로 꺼질 불이 아니다.


[홍승용 칼럼 39]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이 글은, 2008년 6월 30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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