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부정하는 건국절"

평화뉴스
  • 입력 2008.08.2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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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조선병사 탈영사건' 도모한 허상도(85) 선생...
해방 후 '학병동맹' 주도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허상도(85) 선생...(달서구 상인동 자택. 8월 13일 오후)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허상도(85) 선생...(달서구 상인동 자택. 8월 13일 오후)

"건국절 주장은 독립운동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 것"
"자기들 논리만 앞세워 자기 공적만 남기려 하고, 일제시대 항일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의 공로와 역사는 묻어버리고...그게 말이나 돼! 나쁜 놈들이지"

청춘을 일본 군사로 보낸 노(老) 애국지사는 광복절을 앞두고 논란이 커져가는 '광복절.건국절 논란' 이야기가 나오자 언성을 높였다.

일제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허상도 선생(85.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그는 "8.15 광복절을 건국절로로 하자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건국절 주장은 해방 전에 일어났던 독립운동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청춘을 보낸 허 선생을 13일 오전, 선생이 살고 있는 대구시 달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났다.
선생은 이날 오전 아내가 혈압으로 급작스럽게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져 초조함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지난날을 이야기 했다. 그는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60년도 훨씬 지난 자신의 옛 이야기를 풀어놨다.


"조선인학도 특별지원병?...붙잡혀 가는 거지. 어떻게 지원이냐"
"대학교 1학년 때였지. 원래 조선 대학생들은 병역의무가 없었는데 왜놈들이 전황이 불리하니깐 한국인도 군대에 보낸다 하는 거야. 아직도 생생해. '조선인학도 특별지원병'이라고. 그래서 나는 '지원하는 게 아니다. 입영통지서에 '지원병'이란 단어를 삭제해 달라. 일본법에 의해 붙잡혀 가는 거지. 어떻게 지원이냐'고 떼도 쓰고. 죽어도 못 간다고 했지"

1944년 일제는 2차세계대전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지막 수단으로 조선인 대학생 강제징집에 나섰다.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중앙대학(일본 주오대학.1885년 설립된 일본의 법률전문대학) 법과를 다니던 허 선생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그는 일본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결국, 그해 1월 20일 강제징집되고 만다.
 
<1.20학병사기> 중 허상도 선생이 직접 쓴 글...<우리는 끌려갔을지언정 自進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1.20학병사기> 중 허상도 선생이 직접 쓴 글...<우리는 끌려갔을지언정 自進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허 선생이 배치 받은 부대는 '보병 제80연대 대구 24부대'. 현재 대구시 남구의 '캠프워커' 자리다. 허 선생은 "지금 대구에 있는 미군부대 자리는 일제시대 때 전부 일본군대가 주둔했었다"고 말했다.

"24부대에 가보니 전국의 학도병들이 전부 대구에 온 거야. 나를 포함해 28명은 누더기 옷을 입히고, 나머지는 새 옷을 입히더군. 나중에 알고 보니 새 옷 입은 학도병들은 전부 최전선으로 보냈더라구"


1944년 8월 대구, 조선병사 6명의 탈영
그 후 허 선생을 비롯한 28명의 학도병들은 일본인 군사와 함께 병영생활을 했다. 병영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일본군 학도병으로 있을 때 일본군사가 괜한 트집을 잡고 얼마나 괴롭히는지... 열 받아 일본인 상등병을 패 영창도 가고 모진 매도 많이 맞았어. 광복 후에는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일보다 왜놈들 쫓아내기에 바빴지. 하도 왜놈들한테 진저리가 나서 말이야"

일제말기인 1944년 8월 대구는 학도병으로 입대한 조선병사 6명의 탈영 소식으로 발칵 뒤집힌다. 원래 탈영을 계획했던 조선인 병사는 6명이 아닌 7명. 당초 허 선생도 탈영한 6명과 함께 탈출 방법과 시기 등 계획을 함께 짰었다. 허 선생은 그 때를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징집이 뭐야. 왜놈들 위해 조선인이 대신 죽으라는 소리잖아. 조선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우예든동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 전황은 불안해지고 이대로 있다간 일본군사로 개죽음을 당하는 건 뻔한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을 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 모두 7명이 단합해서 모의했어. 하수구를 통해 도망치자고 날짜까지 정했는데..."

하지만 탈영에 나서기로 한 날이 공교롭게도 선생의 불침번 당번일 이었다. 모두 함께 탈영할 것인가, 허 선생을 두고 6명만 탈영할 것인가. 7명은 고민에 빠졌다. 불침번 첫 번째 보초인 허 선생이 행방불명이 되면 금세 탈영한 것이 드러나 모두 잡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7명과 함께 탈출하고 싶었지. 누가 일본군복 입고 전장에 나가고 싶겠어. 하지만 탈출하기로 한 날에 불침번 근무명령이 떨어진 걸 어떡해. 근무자가 없어져 봐. 금방 탈출한 게 들키는 것은 뻔하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어. 가라고. 내가 근무 서는 시간에 탈출을 하고, 난 뒤에 틈을 타서 도망칠 테니 먼저 가라고"

결국 허 선생은 탈영하지 못했고, 6명의 탈영 사실은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도 몰랐다. 아침이 되자 24부대는 난리가 났다. 대구 전역이 탈출자 색출에 몸살을 앓았다.

당시 대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학도병 탈영 사건은 보름여 만에 끝났다. 흩어져 도피를 했던 6명이 모두 체포됐기 때문이다.


탈영 6명 모두 훈장..."조선의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해방 후 이 6명은 모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에 징집돼 탈영까지 하면서 조국을 위해 애썼다는 공이 인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탈출 계획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탈영하지 못한 허 선생은 아직까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탈영해 2005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은 권중혁 선생(87)의 증언에 따르면, 학도병 탈영 사건을 도모한 사람은 허 선생까지 모두 7명이다. 선생도 훈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다.
 
<1.20학병일기>를 펼쳐보며 강제징집된 당시 상황을 전하는 허상도 선생
<1.20학병일기>를 펼쳐보며 강제징집된 당시 상황을 전하는 허상도 선생


일본인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 동료들과 탈영을 도모했던 허 선생. 그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탈영을 하고 붙잡히신 분들은 훗날 모두 훈장을 받으셨는데, 섭섭하지는 않으신가요"

허 선생이 말했다.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 같았어도 동료의 탈출을 도왔을 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근데 조금 섭섭하기는 해. 내년에는 나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해볼까. 허허"

선생의 대답은 무엇인가를 바라고 했던 일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이라는 느낌을 줬다.


동촌비행장 공사..제주도 집결..해방..<건준>..<학병동맹>..<1.20동지회>

동료들의 탈출을 도운 뒤 허 선생은 동촌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됐다. 하지만 한 번도 일본군사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싫었다. 선생은 "일본제국군의 병사로 전장에 나가 의미 없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미치도록 싫었다"고 했다.

1945년 3월, 선생은 제주도로 가게 된다. 연합군에 점령된 오키나와를 탈환하라는 일본의 명령에 따라 제주도에 일본군이 집결했는데, 그 가운데 징집된 허 선생도 포함됐던 것이다. 그 해 8월, 허 선생은 제주도에서 일본의 항복 선언과 꿈에 그리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어느 날 연병장에 다 모이라고 한 뒤 라디오로 일본 천황의 항복발언을 들려주는 거야. 한없이 기쁜 마음과 함께 두려운 생각도 들더라구. 왜놈들 매질과 고문도 견뎠는데 막상 돌아가는 배에서 다 바닷물에 밀어 다 죽이는 거 아닌가. 그 때서야 두려운 마음이 약간 들기도 했어"

해방과 함께 부산에 도착한 선생은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잠시 활동하다 '학병동맹' 결성을 주도한다. 이 단체는 1944년 일제의 학도병 제도 시행 후 전쟁에 나갔다가 광복 후 돌아온 학생들의 모임이다. 특히, 대구에서 처음 결성됐기 때문에 대구 출신의 대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선생과 같은 젊은 지식인층의 모임으로 1944년 1월 20일에 강제징집된 대학생 모임인 '1.20동지회'의 전신이기도 하다.

1.20동지회가 결성됨에 따라 허 선생은 상경해 서울에서 거리청소에서부터 계몽활동, 민족반역자 색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특히, 선생은 친일파 청산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한날은 우리가 거리행진을 하는데 한참 하다 보니 우리 행진 인파 뒤쪽에 조선인민공화국, 한민당... 듣도 보도 못한 정당들의 깃발 아래 많은 군중들이 따라오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아! 이제 진짜 해방이구나'. 일제 때 이런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어. 하지만 우리는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활동보다 조선에 남아있는 왜놈들 쫓아내기에 바빴어. 하도 왜놈들한테 진저리가 나서..."


"추호(秋毫)도 친일언행(親日言行)을 한 적은 없노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선생은 해방정국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여운형 선생을 지지했지만 정치활동에는 큰 뜻을 품지 않고, 친일파 청산에만 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죄다 자기 세력이 정권을 쥐어야 한다고 말은 하지. 사실 우리는 그 때 징집 중에 맞은 해방이라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처음엔 잘 몰랐어. 만약 그 때 상황을 잘 알고 바른 정치에 뜻있는 사람이 학병동맹에 많이 있었더라면 좋은 나라 만드는데 도움을 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
 
허 선생이 보관중인 <1.20학병사기>
허 선생이 보관중인 <1.20학병사기>
한국전쟁 후 선생은 그토록 바라던 해방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4.19혁명 후 대학동문이자 고향 선배인 박해정 선생(초대 국회의원.민주당 시절 초대 교통부 장관)의 소개로 철도국에서 일하기도 했었지만 1961년 5.16 이후에는 야인(野人)의 삶을 살았다.

한국전쟁 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보도연맹이 가입된 사실과 좌익 성향의 지식인이라는 평가는 그에게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조차 쉽사리 주지 않았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허 선생은 자신이 직접 썼다는 '1.20학병사기'라는 책자를 하나 꺼내 보였다. 표지에는 선생이 직접 쓴 6개의 소제목이 적혀 있었다. 그 중의 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기왕에 잘못된 것 말 않고 가렸더니...

그 소제목의 글에서 선생은 '비록 나는, 우리는 끌려는 갔을지언정 자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추호(秋毫)도 친일언행(親日言行)을 한 적은 없노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라고 기술했다.

조선의 대학생으로서 어쩔 수 없이 일본군복을 입은 수치감과 동시에 그 상황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행동한 선생의 풍모가 느껴지는 구절이었다.


글.사진 평화뉴스 남승렬 기자 pnnews@pn.or.kr / pdnamsy@hanmail.net
 

 



(이 글은, 2008년 8월 14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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