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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밟으며 그대, 오시지 않으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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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편지1] 이해리 시인
..."가을, 외로운 사람이 아름답고 지나간 뒤에는 그리워질 눈물입니다"

코스모스꽃잎으로 닦아 놓은 하늘, 하늘은 새털구름 한 잎 물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 갑니다. 하늘 파랗게 높아졌으므로 땅과의 거리는 허전하도록 멀어 집니다. 광활해진 대지 위로 풍성하게 익은 것들이 떨어 집니다. 과일이 떨어지고 마른 잎이 떨어지고 꽃들이 떨어지고 내 마음이 고개를 숙입니다. 떨어진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요? 대지는 묵묵히 그들을 받아줄 뿐 행로를 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낙엽은 낙엽끼리 낙화는 낙화끼리 웅성거리며 바스락거리며 길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바람은 그들을 공중으로 후루륵 불러 올렸다가 또 아무데나 팽개쳐 놓습니다.
가을에는 소속을 잃어 헤매는 것들 천지입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외로움 입니다.
외로움은 혼자 깊어지는 법을 가르치는 고단함일까요? 별들은 외로워서 별자리를 바꾸고 지하수는 외로워서 수맥을 바꿀 때 새는 제 몸을 매질하여 머언 먼 연안으로 날아 갑니다. 억새의 흰 손은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다가 풍화되어 가고 시든 연못 속의 수련은 갈 때까지 간 빛깔이 되어 바래 갑니다. N.프라이가 말했듯이 가을은 비극의 미토스(mythos)를 가졌습니다.

여름이 낭만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상실의 계절입니다. 가을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잃어 버립니다.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떠나 보냅니다. 타고난 재가 기름이 되듯 잃어버리거나 헤어지고서야 누구에겐가 귀속되는 걸 느끼는 허전한 때 입니다.

당신은 이 허전함을 어찌 견디시나요?
깊은 산사 해질녘 범종소리처럼 쓸쓸한 생각에 젖었을 그대여 이쯤에서 당신의 사색도 깊어지지 않나요?
우리도 식물들의 한 해 살이처럼 삶과 죽음의 주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란 생각, 정해진 운명 속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라는 생각, 언젠가 윤회의 수레에 실려 어느 낯선 곳으로 보내질 낙엽이란 생각...

당신에게는 몇 번의 가을이 더 남아 있을까요?
나는 이미 써버린 가을들이 너무 쓸쓸하여 숲 속 벤치에 앉았습니다.
내 가슴 위로 가랑잎 두어 낱이 굴러다니고 발목이 가느다란 새 한마리가 지나 가는군요.

그 애틋한 무게로는 나의 외로움을 일으켜 세우지 못합니다.
나는 따스한 햇볕이 등을 어루만지는 낡은 벤치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달콤한 죽음처럼 풍성한 상실로 허허로운내 마음을 벌떡 일으켜 세울 그 무엇을 기다리렵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미움이든 우수에 잠긴 노래이든 꽃잎같은 詩이든....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앉은 벤치 앞에는 지난 여름 땀 흘리며 걸어온 길이 환한 빛을 내며 멈춰 있습니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낙엽을 밟으며 그대 와 주시지 않으렵니까.

가을은 외로운 사람이 아름답고 헤매이는 사람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뒤에는 그리워질 눈물입니다.

 

 

 [시인의 편지1] 이해리(시인. 한국작가회의 대구부회장)                        

* 이해리. 경북 칠곡 출생. 제3회 평사리문학대상 당선.  시집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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