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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 김선옥씨의 청혼 반지
[시인의 편지] 고희림(시인)
"골수에 사무친 여망..비운의 주인공들, 조금씩 희망의 나날 맞을 수 있기를"
2008년 11월 14일 (금) 10:18:59 평화뉴스 pnnews@pn.or.kr

18K 실반지에 그녀의 가늘은 약지가 패어 있었습니다. 긴 생머리를 야무지게 넘긴 작다시피한 키에 나이주름과 삶의 고단함이 단단히 베인 낯빛으로 그 날 김선옥씨는 청도 도서관 주부독서회인 ‘청라 문학회’ 송년의 밤에서 축가를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주부독서회의 동의를 구해 제가 초청한 자리지요. ‘한라에서 백두로’ ‘심장에 남는 사람’ 이란 두곡의 북조선 노래를 명확한 발음과 경건한 음색으로 용맹스럽게 끝내자 그 날의 방청객인 시골 공무원 시골 주부들 시골 남편들과 시골 아이들의 낮 선 시선이, 낮 선 박수가 한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교통비 정도의 약소한 봉투 하나를 챙기고 김선옥씨는 총총히 대구로 돌아갔습니다.

  언젠가 내가 그녀의 반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가담한 단체(대구 자원봉사 능력 개발원 내 북한 이주민 센타)에 소속된 새터민이었습니다.

  “남조선에 와서, 돼지를 키우며 그리 많지 않는 농사를 짓는 박XX씨를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끼고 있는 이 반지는 그 사람에게 받은 청혼 반지 입니다. 낯 선 남녘땅을 처음 밟았을 때에는 일단 안심이 되고 꿈만같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외롭고 힘든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반지를 받았을 땐 무척이나 떨리고 기뻐서 덥석 받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서 하룻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처지가 기쁨에 머무를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후 다시 만남을 청해 결혼을 미루었으면 하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김선옥씨는 잠시 눈물을 보인 후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중국에선 중국남편이 어린 딸과 함께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중국에 전화를 걸어 딸과 소식을 주고 받습니다. ‘기다리라 꾹 참고 기다리라 내가 꼭 데리고 올테니...’란 말로 끝을 맺곤 하지만 서로 눈물로 시작하여 눈물로 전화를 끝내곤 합니다. 하지만 울 일이 그것만이 아니지요. 북조선에서도 가족들이 애타도록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탈북하고 5년동안 모은 돈 백만원을 연변지인을 통해 부쳤댔습니다......”

  “북조선에선 왜 나왔습니까?” 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물음도 답도 없이 그 부분은 그냥 넘어 갔습니다.

  “그런데 죽을 고생으로 중국으로 넘어 가긴 갔습니다만 다시 남조선으로 오려니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뒤그림자를 밟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중국 할아버지와 가짜 결혼한다는 것이 딸이 덜컥 생긴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할 길은 남조선이다 싶어 죽기 살기로 기회를 엿보다가 지금 이렇게 대구시 북구 산격동에 남조선 정부가 임시로 내 준 임대아파트에 입주해 살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정부가 지원해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식당에서도 일하고 기술도 배우고 여러가지로 자력갱생 할 일들을 모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달부터는 적금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통장에 일억이 들어갈 때까지는 결혼 안할 겁니다. 못합니다. 제 돈이 있어야 딸도 데려오고 북조선 가족들에게 돈도 보내줄 것 아닙니까.”

 “저보다 먼저 탈북한 친구의 소개로 박씨를 만났습니다. 달성군 ‘가창댐’근처에서 돼지를 키우며, 소농이지만 성실하고 예의바른 박씨는 사별했는가 봅니다. 아이들이 다섯에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효자 아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정하고 책임감도 강해 저에게 여러 가지 위로의 말과 용기를 주면서 서로 남여 사이가 되버렸습니다. 매일 만날 순 없어도 전화만은 꼬박 꼬박 넣어주지요. 그러나 그 쪽 집안에도 식구가 많고 그 집에 들어가면 그 집 식구들 돌보느라 제 할 일을 다 못할 것 같아 결혼을 미루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박씨의 품이 따뜻해 다 잊고 결혼 해버릴까 싶을 때도 많지만 겁날 것 없는 인생 용맹스럽게 참아내자며 탈북할 때의 죽을 고생을 떠올리곤 합니다. 목표는 크게 잡으랬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김선옥씨와 비슷한 처지의 새터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때로 마음이 서글퍼지고 때로 우리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상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비록 일개 시민이며 일개 새터민 봉사센타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 민족이라면 누구나 아마도 어릴 때부터 줄곧 우리들의 몸과 마음 속에 베어있는 동족이별의 아픔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언젠가 뜬금없는, 그러나 오랫동안 간절했던 이런 제안을 정부부처에다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는 언제인가 그 날을 막막히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누군들 그러고 싶겠습니까만은...) ‘남북한 주민 교환제’를 실시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저런 합리적 절차와 전문적 공청회를 거쳐야 하겠지만 일년이나 이년정도의 기간을 정해놓고 일백명 정도(개인적인 의견)로 서로 남북간 시민이 교환되어 살아보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갑작스런 제도적, 정치적 통일 같은 건 난관과 기약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닐 터고 언제까지나 딱 떨어지는 그 순간을 우리네 정치판에서나 국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마냥 하냥 기대할 순 없는 일 아닌가는 자명할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통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여망은 뼈 속 깊이 깊이 골수에 사무쳐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그 실천에의 의지를 가져 본다면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또박또박 한 번 이런 류의 구체적 방법을 실시해 보는 것은 어떨지 독자들의 의견도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김선옥씨와 같은 비운의 주인공들이 살아 생 전에 조금씩 조금씩 희망의 나날을 맞이할 수 있다면 좀 더 적극적인 모색이 가차없이 필요할 때라고 보는 것입니다.   

(*. 김선옥씨는 가명임을 밝힙니다)   

 

   

 

 

[시인의 편지 3]  고희림(시인)

60년 대구 출생. 99년 작가세계로 등단. 03년 시집 <평화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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