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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회적 단기 기억손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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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기억과 욕망을 놓고 벌이는 싸움

대부분의 인간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조차 자신은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마음속 혹은 몸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뭔가를 계획하고 능력껏 실행에 옮겨 성취감을 맛보거나 좌절하여 불행에 빠지곤 한다.

더욱이 어떤 성취감이든 그다지 오래 지속되는 일은 없고, 새로운 욕망이 샘솟아 또다시 동일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것이 식욕이든, 성욕이든, 권력욕이든, 또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든.

삶을 규정하는 이 반복구조의 상당한 일반성을 감안하면, 세계의 근원적 비밀을 맹목적 삶의 의지라고 요약한 쇼펜하우어의 상상에도 그럴 듯한 구석이 조금 있는 셈이다. 또한 의지가 주인이고 이성은 그 하녀라는 그의 가훈 역시 간단히 묵살하기 어려운 현실성의 요소를 지닌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단기기억손실증이라는 극단적 상황 설정을 통해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구상을 돌이켜보게 해준다. 진행이 다소 복잡한 듯 단조롭고 내용도 심오한 듯 빈약하여 남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의지와 이성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는 좋은 자극제가 될 것 같다.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살해당하는 현장에 뛰어들어 범인 한 명을 살해하지만, 공범의 폭행으로 뇌손상을 입고 단기기억손실증에 걸린다. 사건 이전의 기억은 생생하고 일반적인 사고능력도 멀쩡하지만, 사건 이후의 기억은 10분을 넘기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아내와의 추억에서 나오는 욕망의 에너지로 폴라로이드 사진과 메모와 문신을 체계적으로 동원하여 흩어지는 기억의 파편들을 모으며 복수라는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달려간다.

레너드의 경우 이성과 의지 혹은 인식과 욕망 사이의 균형추는 너무 확연하게 의지 혹은 욕망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셈이다. 그가 아무리 체계적으로 사진을 찍고 메모하고 문신을 하더라도 그의 기억장치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종종 그는 자신이 어디서 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는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태를 아는 테디와 나탈리에게 이용당한다. 이들로 인해 그는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나 영화의 끝부분에서 반전이 확인된다.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간파한 순간 그 허약한 이성이 그의 의지에 간섭하여 욕망의 구체적 형태를 새로 규정해 간다. 자신을 이용하는 테디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레너드의 의지는 테디를 범인으로 몰아가도록 다시 그의 이성을 동원하고 결국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의지의 명령을 받는 하녀 이성이 거꾸로 주인인 의지에게 명령을 하기도 한다는 것은, 의지 혹은 욕망을 절대화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레너드의 경우보다 더 복잡한 기억체계를 활용할 수 있는 일반인들의 경우 이성의 간섭은 훨씬 더 다면적이고 빈번할 것이다.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에서는 의지 혹은 욕망에 따라 이성 혹은 인식이 작동하는 것만을 확인하기 쉽지만, 그 의지 혹은 욕망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무수한 인식들 경험들 혹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모습도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에서 이성과 의지의 관계는 쇼펜하우어나 그 제자들의 상상과 달리 주종관계가 아니라 실은 상호규정관계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의지나 욕망이라는 것이 맹목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끊임없이 이성의 간섭을 받아 왔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희망의 싹을 볼 수는 없을까?

근래 우리 사회를 10여년 이전으로 돌려놓은 범사회적 단기 기억손실증 때문에 종종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설혹 성장의 추억과 패권의 욕망에 밀려 기득권의 횡포를 끊임없이 망각하는 이웃들과 레너드의 모습이 자꾸 중첩되더라도, 우리는 그래도 레너드보다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풍부한 기억장치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좀 바보처럼 뿌듯해 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무수한 기억들, 이성적 자료들의 도움으로 사회적 욕망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규정해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지배자들의 욕망은 껄끄러운 기억들의 불편하고 불쾌한 간섭을 피하고자, 매스컴으로 양산되는 휘발성 단기기억은 물론 교과서에 새겨진 딱딱한 기억까지 독점하려 든다. 서민들을 중단기 기억손실증으로 몰아넣고, 이들의 욕망을 고만고만하고 고분고분한 형태로 끊임없이 단순재생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만만한 프로젝트가 아님은 인터넷에 넘쳐나며 네티즌들을 잠시나마 즐겁게 하는 온갖 종류의 쥐 이야기들이 역설한다. 거리에 촛불의 강물이 흐르지 않아도 기억과 욕망을 놓고 벌이는 싸움은 뜨겁게 불타고 있는 것이다.

[홍승용 칼럼 41]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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