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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뀔 때마다 교과서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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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없어진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7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구시내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는 대학 진학하려면 일종의 자격고사에 해당하는 예비고사라는 것을 친 후 각 대학마다 그 대학이 자율적으로 출제하는 본고사를 치면 입학했다. 본고사 과목은 대개의 대학이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이었다. 예비고사 점수도, 내신 성적도 필요 없었다. 일단 예비고사에 합격한 후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서 본고사만 보면 되니까 고교생활이 지금보다는 다소 느슨하고 여유가 있었다. 나도 이때 전혜린이니 김형석이니 하는 한국의 에세이스트나 톨스토이, 사르뜨르 등 많은 세계 명작들을 대부분 읽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당시 수업시간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이 입시 주요과목인 국, 영, 수 시간 외의  다른 수업시간에는 정통종합영어나, 수학정석을 펴 놓고 영, 수 공부에 몰두하거나 나 같은 문학소년 경우는 소설책이나 시집을 읽는 것이었다. 국영수가 아닌 여타 과목 선생님들은 자기 수업시간에 영, 수 과목을 펴놓고 선생눈치를 살피며 몰래 타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애써 외면하기도 했고, 성질이 마른 선생은 그런 학생을 발견해 호되게 혼을 내기도 했다.

   학생들이 무시(?)하는 수업가운데 특히 미술과 음악이 으뜸이었다. 이 과목은 예비고사에서도 비중이 낮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이 타 과목을 공부했고 선생님도 은근히 방관해주었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미술선생님은 당시 꽤 유망한 작가였던 것 같다. 당시 프랑스의 ‘르 쌀롱전’에 금상인가, 은상인가를 받았다고 아침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전교 학생들에게 자랑했던 것 같다. 어린 우리들은 이 상의 구체적인 비중은 몰랐지만 하여튼 프랑스에서 받은 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게 생각했다.

  나는 미술을 잘 못했다. 특히 그림을 못 그려서 초등학교 때부터 애를 먹었다. 그 솜씨가 고등학생이 됐다고 달라질리도 없고 해서 미술시간에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게다가 이 미술선생님께서는 성격이 괴팍해서 수업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작대기로 학생들의 머리를 딱딱 때렸는데, 그때의 표정도 학생들을 공부시키려는 애정이 묻어있는 모습이 아니고, 매사 귀찮다는 듯한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애들을 때렸다. 우리는 그런 모습이 예술가 특유의 나태함 정도로 이해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한번은 예의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수업시간에 자신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했다. 무용담을 한창 하다가 갑자기 “야, 너들은 우리나라 군인이 월남가면 월남의 꽁까이(아가씨)나 국민들이 환영할 것 같지. 안 그래 우리나라 군인이 지나가면 월남사람들은 뒤에서 개XX! 하면서 침을 뱉는다.”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어떤 말이 이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말은 오랫동안 선명하게 내 기억에 남았다. 얼마 후 그 선생님은 진주의 무슨 전문대 교수로 갔다가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꽤 이름을 날리더니 이른 나이에 고인이 되었다.

  지금도 내가 그 분의 이름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때의 이 한 마디 때문이다. 사실 70년대에는 월남전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시골서 고등학교를 다닌 누나는 학생 간부라는 이유로 뽑혀 안동역에서 멀리 부산항까지 가서 파월군인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며 환송하기도 했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김추자) 같은 노래가 대중가요계에 풍미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정도 다니던 어린 우리들도 우리나라 군인들이 세계평화의 수호자처럼 생각하면서 한껏 자긍심으로 고무됐다.

  그런줄만 알았는데 그 자랑스러운 우리 군인의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하면서 침을 뱉는다, 사실 충격이 왔다. 그래서 그게 진짜냐 하고 질문을 했지만 당시 미술선생님은 씩 웃으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후 대학에 진학하고 리영희 선생의『전환시대의 논리』『8억 인과의 대화』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황석영의『무기의 그늘』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월남전의 세계사적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기 시작했고 파병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사르뜨르 같은 知性이 ‘월남전을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고 일갈했다는 사실도 점차 알게 되었다.

  내가 고교시절의 그 미술선생님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그 분의 그림 때문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따지면 세계 정치.경제사적으로 월남전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이겠지만, 적어도 당시 월남전의 실상에 대해 외눈박이로 알고 있던 대한민국 대구의 고교생에게 기존의 주류적 시각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념에 따라 이것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을 말해주었다는 데서 나는 미술선생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사실 진실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 미술선생을 기억할 리 없다. 나는 진실게임이나 역사적 폭력 속에 묻혔던 어둠이 햇볕 속에 드러나는 일을 볼 때마다 그 미술선생님을 생각해 내곤한다.

  최근 학교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 교과서 선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교실에서 채택률이 높은 모 출판사 발행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비판을 받고 교체 압박을 받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이 최근 좌편향 교과서 바로잡기라는 이름으로 연수를 실시하기도 했고, 서울지역 240여개 고교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주문 계획과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산교육청도 특정 교과서를 쓰는 관할지역 고교 학교장들을 불러 모아 교과서 재선정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시대착오적인 행태인가? 이 교과서들은 역사 전문가들에 의해 엄중하게 검증된 책들로 이미 현장 교실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설사 이념 편향의 의구심이 있더라도 현장의 교사들이나 교과서 편찬 학자들의 자율과 자정 능력에 맡겨두는 게 순리이다. 정권 차원에서 교과서 편찬이나 수용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바꿔야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서울시 교육청은 일선 고교에서 실시할 현대사 특강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강사 145명의 명단을 확정해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는 145명의 강사들이 주로 좌편향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우편향의 강사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 논단에서 대표적인 수구 우익인사로 꼽히는 언론인 조 아무개 씨와 서울대 이 아무개 교수는 워낙 여론이 나쁘니까 본인 스스로가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강사가 우편향의 의혹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 현대사 특강 강사진에 역사학 전문교수나 연구자 등 전문가가 거의 포함되지 않고, 피부과 의사나 경찰 등이 강사로 선정된 것도 이 강좌의 부적절성이나 의도성을 갖게 한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 좌편향 문제를 제기하는 쪽의 논리는 기존의 좌편향 교과서가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국가의 정통성이 훼손되고 학생들의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약해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통성이라는 것은 역사 교과서를 통제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조작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통성은 오직 국민들이 정부를 믿고 그 권위를 신뢰할 때만 확보된다. 이는 국가뿐 아니라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투명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신뢰가 쌓인다.

  우리의 이런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을 두고 우리 현대사에 밝은 외국의 학자는 국가가 역사에 개입하는 행태에 대해 “짜낸 치약을 다시 튜브 안으로 다시 밀어 넣으려는 시도이나 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부르스 커밍스)는 고언을 했다. 이 말을 의미를 잘 새겨봐야 한다. 그게 어떤 종류의 책이든 진실을 추구하고 진리를 갈파할 때 대중들은 따라가고, 그렇지 않으면 외면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우둔하고 눈먼자들이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없어진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김용락 칼럼 25]

김용락(시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daegusc@hanmail.net)

*. 1959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김용락 시인은, 지난 '8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뒤 <푸른별>, <기치소리를 듣고 싶다>, <단촌역>, <민족문학논쟁사연구>를 비롯한 다수의 시집과 평론집을 펴냈으며, [대구일보] 논설위원과 [대구사회비평] 편집.발행인을 거쳐 현재 [경북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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