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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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어머니는 그 둘을 하나로 뭉치는 '혼불'을 지핀다"

어머니의 '혼불'

아직도 차가운 초저녁 강가에서 소지장을 불살라 하늘로 올리며 두 손을 모으는, 하늘에 닿고야말 어머니의 그 간절함에 나도 따라 두 손 모아 절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두 손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엊그제 어머니를 속여 먹은 짓이 어찌나 선명하게 다가오는지. 이 희한한 체험 때문인지, 나는 살면서 큰 죄를 지었다 싶으면 으례껏 두 손을 모우는 소원의 자세를 취한다.

소원은 욕망의 정신적 표현일 터인데, 욕망함은 용서를 구함이라고 해도 될까. 하나는 가치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영역인데, 어머니는 그 둘을 하나로 뭉치는 '혼불'을 지핀다.

어둠 때문에, 추위 때문에, 불을 밝히고 태운다. 간절한 소망, 감사의 기원, 분노의 절제, 그 때에도 불을 밝히고 태운다.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일어날 때는 횃불을 치켜든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불을 지핀다. 그렇다면 불은 민중의 것이고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개념이라고 봐야겠지. 지배층이 불을 오락으로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불은 역사임에 틀림없다.

영혼 없는 교과부, 형평 잃은 교육감
 
일제고사, 7명의 교사를 해직 파면하고, 해보자는 듯이 어제 다시 일제고사를 치룬다. 서울 경기는 빠짐없이 모두 시험에 응했고, 지방 변방에서 21명이 체험학습에 참석했다고, 교과부가 서둘러 ‘청와대’를 향해 공식 발표한다. 1급 사표 제출, 강제적 조직 개편, 이런 정도라면 한숨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교과부는 영혼이 없나보다.

나는 일제고사를 아주 간명하게 이렇게 이해한다; 일제고사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아주 손쉽게 읽어내어 마음먹은 대로 관리하려는 방편이다. 석차 평균 총점이면 충분하다. 이 방편을 가지고 교육제도를 일괄 운영한다. 그것을 학력이라고, 학력이 국력이라고 상징조작하면, 대중은 두말없이 따라 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그 확신 때문인지, 그들은 일제고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획일의 멘탈리티와 지식기반시대 창의성의 멘탈리티 사이를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드는 정신적 분열을 즐기는 것 같다.

해직 파면은 징계의 형평을 잃은 공정택 교육감의 처사라고 하는데, 나는 이성을 잃은 처사라고 본다. 도무지 그럴 사안이 아닌데도 이성을 팽개칠 만큼 사건을 키우는 것을 보면, 해직 파면은 정치적 술수가 들어있는 함정사건임이 분명하다. 단체협약무효에서 시작한 전교조 죽이기의 함정이겠지 아마도. 국가 권력도 인간 삶의 기본을 지키는 교육 종교 문화 예술의 영역에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데, 우리는 어찌된 판인지 교육, 종교가 자청하여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나서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실용주의'와 '속물 실용주의'

불을 밝힌다. 이전에 밝힌 불을 다시 밝힌다. 그게 가능할지. 그 동력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나. 그 불의 역사성을 다 까먹지는 않았나. 관료화되어 내부의 정치(민중)를 잃은 나머지 교사대중과 학부모대중과의 소통에 벽을 쌓아버린 전교조가, 불을 지필 수 있을까.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던데, 생명이 다한 전교조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다행이다. 일제고사를 능가하는 대체 평가대안을, 학력을 능가하는 대체 학력안을, 교원평가를 능가하는 교사자정 대체안을 내자는 목소리가 전교조안에서 터져 나온다. 실은 그런 대체안을 키워왔다. 전교조 지도부의 내부 정쟁이 그 대체안들을 파편화시켰다.

그 파편을 이렇게 체계화하면 어떨까; 교육의 제일의 원리는 아이들이 참가하여 배움을 찾아가는 학습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 원리의 실천은 교육과정 정상운영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 능력은 개인교사의 ‘수업잘하기’를 매개로 다양한 형태의 학력 신장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체화된다. 그 구체화 능력이 전문성이다. 교사는 그 전문성을 가지고 사회적 발언을 한다.

이것이 현 단계 전교조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실용주의 전략을 구사한다. 인간 얼굴이 그려진 실용주의가 이명박 정부의 속물 실용주의와 얼마나 다른지를 국민이 판가름하도록 펼쳐 보인다.

"맞아, 그래야 해" 라고 탄성 쏟아내는 모두의 2009년을!

실용주의 전략은, 자신의 ‘합리적’ 주장의 그 합리를 잠시 내려놓음으로서 다른 이해관계 세력의 주장에 귀기울이게 되는 낮은 자세를 취함이다. 그 자세로 다른 세력들이 동의할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아내 함께 토론하여 풀어낼 ‘문제’로 확정하는 소통의 길을 튼다. 전략은 소통의 문제다. 그래서 현실적이어야 한다. 문자 그대로 이해관계이다. 목적이나 명분이나 원리가 아니다. 이해관계이기에 눈에 보이는, 계산가능한 주고받기이다. 이해관계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안심하고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여유를 제공하는 것이 정치이다. 그 정치가 있기에, 사람들은 삶의 풀 수 없는 문제마저도 안고 갈 수 있다. 그 풀 수 없는 문제는 영혼의 문제일 수도, 우주적 조망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고민을 안고 갈 수 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탄생한다. 그 지평을 여는 것이 교육이다. 그 개인을 살피는 것이 교육의 기원이다.

그렇다면 ‘교육적’ 경험은 절정의 경험, 예술적 경험에 비유하여 구성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현실이고 교육은 이상이다. 정치는 교육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정비한다. ‘정상적’ 사회라면 교육이 정치(국가) 보다 우선한다.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민주주의는 인류가 발명한 최상의 삶의 형태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실용주의철학은 휴머니즘이다. 삶의 교육을 말하거들랑 지금 공통의 이해관계를 찾아 그것을 문제로 확정하고 풀어나가는 토론의 장을 열어라.

몸으로 느끼는 난관 앞에 서 있다. 내가 난관을 자초했는지 시대가 난관을 덧씌웠는지, 따지지 말자. 함께 할 끈을 장만하려고 하거들랑 내 탓 네 탓 하지말자. 속물의 실용주의에 편승한 무정견에 우선 대칭 정견을 내 놓아라. 뭐든 반대만 하는 짓에 식상할 대로 식상해 있다.

‘맞아, 그래야 해’ 라고 탄성을 쏟아내는 모두의 2009년이기를.





[김민남 칼럼 19]
김민남 / 교육학자. 전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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