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중한 시기,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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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양심을 믿는 사람들, 아무 조건없이 모이고 만나야 한다"

"오늘, 검찰은 죽었습니다"

  짤막하고도 무미건조한 이 조사(弔辭)는 지난 2월 9일 검찰의 용산참사 수사발표 이후,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희생자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이 수사결과에 항의하며 내걸었던 펼침막에 적혀있던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 앞에, 그것도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 앞에서 검찰이 '살아 있었던' 기억을 가진 국민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날 유족들과 시민단체들이 새삼스럽게 "검찰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법 이전에 인간의 상식과 양심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양심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금 이 나라에는 법치의 깃발만 펄럭이고 있다. 

힘으로 강요된 예의는 굴종일 뿐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법치를 들고 나온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이사(李斯)는 누구보다 예치(禮治)를 강조하던 공자의 학풍을 계승한 자하(子夏)와 순자(荀子)의 제자들이었다. 사실 권력자들이 내세우는 '예'(禮) 이데올로기는 가식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런 대등하지 못한 관계에서 예를 강조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라는 강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공자의 예를 '충성과 믿음을 가리는 얄팍한 껍데기(禮者忠信之薄)'에 불과한 것이고, '난세의 시작(而亂之首)'에 불과한 것이라 빈정댄 것이다. 힘으로 강요된 예의는 굴종일 뿐, 그래서 그 부당한 굴종을 견디지 못한 민중은 거칠게 저항한다. 이를 권력자들은 무례(無禮)하다며 가혹하게 처벌한다.

그런데 권력자들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형벌은 어떠한가? 무한한 면책특권을 누린다. 하지만 민중은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쳐다보며 천벌(天罰)만 바랄 뿐이었다. 기껏해야 권력자를 서생원에 비유하는 시(詩經/碩鼠,相鼠)나 지어 흥얼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의가 깔리지 않는 법치는 폭압의 도구일 뿐

 이렇게 공맹순(孔孟荀)의 예치가 '예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형벌은 대부이상으로 미치지 아니하는(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한계에 봉착하면서 등장한 것이 법가의 법치이론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에서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법치가 예치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제정된 법과 원칙이 계층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공평무사함을 강조했던 탓이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의 법이 근대사회의 법과 달랐던 것은, 법을 제정하고 공포하는 권한이 아무런 견제장치 없이 오로지 군주에게만 독점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법가의 이론이 진시황제의 폭압정치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대명천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 나라의 법은 공평무사함은 고사하고, '전관예우'와 '유전무죄'라는 불문율이 천하를 지배하고 있고, 반드시 문서로 제정, 공포되어야 효력을 발휘하는 헌정질서에 한 나라의 최고재판관이란 사람들이 관습헌법을 들먹이는데도 무사히 임기를 마치도록 보장해주고 있다. 중국고대사회의 법치 수준에도 못 미치는 한심한 수준인 것이다. 법치와 원칙을 신념처럼 입에 달고 살 요량이면 춘추전국시대에 법과 원칙을 태자라도 예외 없이 집행하던 상앙(相鞅)의 최후를 기꺼이 감내할 배포정도는 있어야할 것이다.

군주에 대한 예의가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가 바탕에 깔리지 않는 법치는 폭압정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순자는 예의 근본을 "인간의 생사를 엄숙하게 처리하는 것(禮者 謹於)治生死者)....)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인간이 금수(禽獸)와 구분되는 점은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과 함께 종족의 죽음을 배려할 줄 아는 심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식과 양심,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면


살기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억울한 주검에 육시(戮屍)질까지 해대놓고 법과 원칙에 따라 처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한 사람의 군주를 위해 이 나라의 법을 독점하면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상식과 건강한 양심을 짓밟고 있다. 그렇게 도륙(屠戮)된 주검은 아직 마지막 안식처조차 찾지 못하고 냉동고 속에 갇혀있다.

검찰이 죽었다고 애석해할 필요도 없다. 검찰이 단 한번도 살아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격에 대해 해석하고 분석할 필요도 없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 파시즘이 올지 말지 쓸데없이 어려운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한가한 식자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지금 이 위중한 시기에 법 보다는 인간의 상식과 양심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사람은 아무 전제조건 없이 모이고 만나야 한다. 원탁회의든, 만인공동회든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만나야 한다. 작은 심판의 날이 벌써 내년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김진국 칼럼 21]
김진국(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의사.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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