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이 아이들의 눈을 밝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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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칼럼] "빈곤의 참상, 세계 절반의 굶주림..문제는 분배"

지난 설 때의 일이다. 매번 설 때면 과음과 과식으로 며칠 씩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술이든 음식이든 적게 먹고 편안한 설 명절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고향을 향했다. 실제로 몇 해 전에는 설 끝에 먹은 게 탈이 나서 새벽에 119에 실려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밤새 토하고 링거를 맞고 나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병원 응급실 문을 나설 때 그 느낌이란...

  음식과 술맛에 이끌려 과식하고 탈이 나서 병원신세를 지고 밤새 고통받다가 아침에 병원문을 나설 때의 자괴감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욕망의 포로인가? 아니면 탐욕 그 자체인가? 매사에 절제할 줄 모르는 악습이 식습관에서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굳이 한 가지 변명을 삼자면 명절을 전후하여 먹고 마실 환경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다는 것이다. 일찍이 초등학교도 마치기 전에 객지로 떠난 나에게 어릴 때 친구는 더 없이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고향에 남아있는 동창생 몇 명과 계를 만들었다. 이 친구들과 설 바로 전날 모임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흥취를 도저히 피하기 어렵다.

인생의 벗...그날 밤

  몇 명만 소개를 해 볼까? 나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인생의 벗들이다. 한 녀석은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면사무소에 급사로 취직을 했던 친구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부러워하던 그 애잔한 눈빛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하던 가슴 아픈 녀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중견 공무원이자 말 그대로 고향 지킴이다. 또 다른 녀석은 공고를 나와 이웃 소도시의 전쟁무기를 생산하는 ㅍ금속공장엔가 뭔가에 취직을 해서 군대를 면제받은 친구이다. 여전히 객지를 떠도는데 명절 때 1년에 한 번 정도 만난다. 아, 또 있다. 1년에 한 번 만나는 친구가. 이 녀석은 내 초등 2학년 때 담인 선생님 아들인데 고등학교 졸업 후 대구인근에 솔가해서 현재는 자동차학원 조교를 하고 있다. 워낙 인물도 좋고 언변이 뛰어나 술집에서 여성들에게 인기 독차지한다. 어릴 때 유복하게 자랐는데 어쩐 연유인지 이혼하고 사업실패하고 인생유전을 겪고 있는 중이다.

  또 다른 한 친구는 고향에서 자두 농사를 짓는다. 일찍이 해병대에 입대해 휴가 나오면 술이 엉망으로 취해 좁은 시골 동네를 휩쓸고 다니던 전형적인 과거 해병대(개병대?)였다. 지금은 과거 술 취해 행패를 부렸던 자신의 모습을 젊은 날 객기로 부끄러워하는 순박한 농부가 되었다. 또 다른 친구는 농고를 졸업한 후 농업지도사로 취직했다가 곧 그만두고 농약방을 차려 시골에서는 수 십억 단위의 제법 돈을 많이 번 사업가가 된 친구이다. 뒤늦게 대학을 다닌다고 열공 중인데, 경제력에 비해 친구들에게 술을 잘 사지 않아 자린고비로 통한다.

  이 밖에 10대 후반에 일찍 장가들어 벌써 손자를 본 새마을지도자 친구, 그 유명한 의성 마늘농사의 주역으로 소방대장을 겸직하고 있는 친구, 자신의 주업인 농사에 대해서만은 우리나라 최고를 자부하지만 가끔 노름에 손 대 경찰서 근처도 가 본 녀석 등 10여명이 모이면 밤이 새도록 시끄럽기 그지없다. 사실 이번 설에도 술자리 끝에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농약방을 하는 친구가 자기 집에서 농약을 사지 않는다고 한 친구에게 시비를 걸었고 이게 번져 영농 방식으로까지 논쟁이 이어져 한창 분주했다. 이렇게 한바탕 싸우고 웃고 하면서 한 잔, 또 한 잔 하다가보면 어느새 소주에 거나하게 취하게 된다.

  이 번 설에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밤이 이슥하여 집에 돌아왔다. 전깃불만 휑하게 밝은 시골집 마당은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왔다. 이 마당에서 자치기, 구술 치기로 유년을 보냈는데 어느새 지천명을 넘어섰구나 하는 어떤 생의 쓸쓸함이 갑자기 확 밀려들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다시 또 한 잔...

"저 먼지가 모두 밀가루였으면"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새벽녘에 잠이 깼다. 바뀐 잠자리 탓인지 아니면 과음 탓인지 새벽에 혼자 일어나니 몸 상태도 좋지 않고 갑자기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맡에 보니 초등학생 딸애가 보던 책이 눈에 띄었다. 한비야 라는 여행가로 알려진 여성이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이었다. 지은이의 이름은 진작에 들어 본 바가 있었지만, 내 독서 목록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소위 순문학(?)을 지향하는 나는 처세서나 여행기 같은 책은 좀 시시하게 여기는 편견이 있다. 뭔가 실존의 고민이나 신비감을 찾거나 맑시즘으로 세상의 변혁을 기도하는 책에 끌리는 게 내 취향이다. 요즘 열공 중인 책은 김수행, 장하준, 케인즈, 하이에크 같은 경제학자이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 떼우기로 펼쳐 들었던 이 책에서 나는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과외의 소득이랄까?. 가령 소설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책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일종의 휴머니즘 소설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불행했던 삶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 어떤 계급문학 작품보다 강렬한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과외의 소득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 데 이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한 씨의 이 책에는 아프가니스탄에 묻힌 지뢰를 제거하는 데 1천년이 걸린다거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행사로 할머니와 한 살짜리 갓난아기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이스라엘의 야만, 아프리카의 에이즈문제 등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억해 둘만한 내용도 많지만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굶주림에 대한 기록은 경청할만하다.

  ‘저 먼지가 모두 밀가루였으면’이라는 소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전 세계 각 지역의 굶주림은 참혹하다. “캄캄한 방안에 죽은 듯이 누어있는 갓난아기. 팔은 말라 비틀어졌고, 다리는 꼬챙이보다 더 가늘다.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려보는 젊은 엄마, 두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꼬마. 집 앞에 누워 초점 잃은 눈빛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가재도구는 다 팔았는지 방안에는 옷 몇 가지와 빈 냄비만 덩그렇다”(35쪽) 영양실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설사를 하다가 죽는, 몸이 새털처럼 가벼운 아이들, 배가 고파서 독초를 뜯어먹고 신장과 위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눈이 멀어져서 죽는 아이들, 어떤 지역은 일주일 안에 식량원조가 오지 않으면 주민 1천5백 명, 아니 53만 명 대부분이 굶어 죽는 상태라고 한다.

북측 인사의 눈초리

  이 책의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전 세계적인 기아는 자원부족이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다. “이 지구에는 60억 인구를 모두 먹여 살리고도 남을 충분한 식량이 있다. 10년 가뭄이 들어도 부자들은 굶어죽지 않는다. 문제는 분배다”(72쪽). 정말 문제는 분배다. 한 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데 한 편에서는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빈곤학자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는 이 세계의 빈곤에 대한 참상이나 그 원인에 대한 기록이 선명하다. 우유제품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다국적 기업 ‘네슬레’가 칠레와 같은 제3세계 어린이들을 어떻게 빈곤으로 몰아넣는지에 대한 기록은 같은 제3세계였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특히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1970-1990년 미국 월스트리트의 은행가, 미 재무부, 국제 금융조직 간에 맺은 이른바 워싱턴합의의 네 가지 원칙, 즉 민영화, 규제철폐, 거시경제안정, 예산감축은 세계를 빈곤으로 이끄는 빈곤의 첨병이다.

  앞서 세계 인구가 60억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2006년 2월 26일 현재 세계인구는 65억을 넘어섰고, 1984년 기준으로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으로 지구는 120억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는 맹인 수가 5천 명이고, 1억4600만 명이 눈 결막질환에  감염되어 있는데 그 원인이 바로 굶주림이라고 하고, 영양만 회복되면 간단히 치료될 수 있는 질환이라고 한다.

  2005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8억 5천 명이 절대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인구의 18%, 아프리카 인구의 35%,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안 지역의 14%가 굶주림으로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기아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와 농촌지역이다. 한비야 씨의 글에서도 언급되지만 북한, 평양정권의 기아도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내가 남북작가회담에 참석 차 평양과 백두산 일원을 둘러보고 묘향산 호텔에선가 북측 고위인사가 베푼 저녁 만찬 때 음식물을 마구 남기던 남측 일행을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북측 접대여성들의 냉소(?)는 오래 동안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내 마음의 탐심

  인도주의 경지에서 도와주어야 할 북측 어린이들의 기아문제도 이명박 정부 들어서 경색되는 남북관계 때문에 속수무책이 되고 있다. 아무래도 가진 자가 인심을 보이는 게 세상의 인심이자 이치인데 안타깝다!

  한비야 씨의 책을 읽던 새벽, 간밤의 질펀한 음주가무와 마구 남기고 온 식탁 위의 음식물 잔재들이 오랫동안 눈에 밟혔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먹다 남기고 온 한 접시의 먹을거리라면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영양실조 때문에 눈이 멀어져가고 있는 가난한 아이의 눈을 밝게 해 줄 수 있을텐데...

  이제 음식물에 대한 탐심뿐 아니라 마음의 탐심도 좀 덜어낼 나이가 되었는데 하는 자탄으로 지난 설 명절 며칠 간을 내 몸과 마음은 앓아 누웠다.


 

 

[김용락 칼럼 26]
김용락 / 시인. 경북외국어대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daegus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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