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집권 이후 진보 개혁 민주 세력의 기세는 꾸준히 잠식당해 왔다. 독재정권에 맞서는 것만으로 일단 정당성을 벌고 들어갔던 그 이전과 달리, 이제 조금씩 가진 것이 늘어나 조심스러워지기도 했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목에 힘을 주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혐오감을 사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수세적이었다.
반면에 조중동을 앞세운 수구 보수 쪽은 치밀한 전략 덕분이든 동물적 본능 덕분이든 줄기차게 공세를 펴왔다. 어쩌다 독재정권 시절의 10분의 1짜리 비리라도 민주세력 쪽에서 터지면 몇 달이고 일일연속극처럼 반복해서 중계하여 유권자들을 세뇌했다. 반세기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그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2002년 대선 한참 전부터 이회창은 이미 대통령이 다 된 듯이 기세등등했었다. 노무현의 대선승리는 기적에 가까웠다.
2002년 다시 정권을 놓치고도 자칭 메인스트림 쪽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공세를 펴왔다. 탄핵도 신나게 밀어붙여 보았고, 대통령 알기가 동네 머슴쯤이었다.
그런데도 진보 민주세력은 도덕적 헤게모니나 미래전략의 대중적 설득력 차원에서 전혀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전반적인 수세적 환경과 몇몇 중간보스들의 패권욕망으로 전략도 기세도 없이 밀렸다. 이명박의 집권은 일찌감치 확정되다시피 했고, 새로운 기적은 없었다. 더구나 차기는 박근혜라고 자포자기하는 분위기까지 팽배해져왔다. 이명박의 온갖 정책뒤집기와 뻔뻔한 언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노무현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민주와 진보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다시 돌아보라고 온몸을 던져 말해주었다. 냉소와 무관심의 옹벽을 일거에 허물었다. 14범도 29만원도 멀쩡히 벽에 똥칠하도록 살 텐데 뭘 그리 잘못했다고 죽느냐고 물을 줄 아는 정치적 균형감각에 불을 붙였다. 그가 국민들의 마음속에 지펴놓은 불씨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만 아니라 이 땅의 양심과 지성도 함께 살려냈다. 웃기는 정치개그가 판치는 이명박 시대에 진실 앞에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우리의 윤리적 본능을 살려냈다. 희망의 불씨를 살려낸 것이다.
이 불씨를 키워내는 일은 노무현이 풀지 못한 문제들과 씨름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탈권위주의나 시스템개선만으로 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난 일 년 반 동안 뼈저리게 겪어왔다. 좋은 제도도 순식간에 뒤집혔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에는 원래부터 종착점이 없다. 참여정부에서도 국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참여 기회는 턱없이 한정되어 있었다. 양극화의 극복은 문제로서 의식되었지만 해답은 한참 멀었고, 그것이 조중동과 보수이데올로그들의 선동 빌미가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불변의 조건처럼 전제되었다. 그래서 진보 쪽은 노무현이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야유를 보냈다. 대연정 제안은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였다.
양극화 극복에 기초한 실질적 민주화를 위해, 사회적 약자들도 당당하게 말하고 일하고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이제 신자유주의적 경쟁 패권 체제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공존과 공유의 문화 건설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은 것이 노무현을 부활시키는 길일 것이다. 진보세력과 민주세력이 힘을 모으지 않을 때 범사회적 재앙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짧은 기간에 충분히 학습했다.
노무현의 가장 큰 가르침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이들의 권익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라는 것이다. 자기 몸을 던지지 않을 때, 지배자들과 패권주의적 욕망을 공유할 때, 표나 세며 표정 관리하기 바쁠 때, 아무리 좋은 전략도 계산도 대의도 모두 공염불에 그치기 십상이다.
노무현 때문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몸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보에 주목하고 싶다. 자기를 버리면 옆 사람에게도 함께 일하자고 말하기가 한결 편해질 것이다.
유시민은 문상객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왠지 그가 밉지 않았다. 그가 몸을 던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이 느낌이 그저 순간적 착각이 아니었으면 한다. 꼭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제대로 싸우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2009년 유월 첫날, 희망이 보인다.
[홍승용 칼럼 43]
홍승용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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