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가 너무 빡빡하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에 급급해 아무 생각도 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과 다른 멋진 세상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형이상학적 본성은 종교로 예술로, 아니면 형이상학적 이상국가론으로, 또 아니면 다양한 변혁적 실천과 이론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상세계에 대한 구상으로는 모어의 유토피아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혹은 맑스의 코뮌만 아니라 플라톤의 이상사회를 떠올려도 좋을 듯하다. 플라톤의 시대 역시 우리 시대 못지않게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워 이상사회를 꿈꿀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위대한 스승 소크라테스가 그저 입바른 소리 자꾸 한다는 사상적인 이유 때문에 사형선고까지 받지 않았던가.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통치자, 수호자, 일반인을 엄격히 구분한다. 또 인간의 본성을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 명예를 추구하는 부분, 이익을 탐하는 부분으로 나눈다. 이 부분들 가운데 어느 쪽을 주인으로 삼고 어느 쪽이 하인 노릇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통치자, 수호자, 일반인이라는 세 집단 중 하나에 소속된다. 통치자는 명예를 추구해서도 안 되고 이익을 탐해서도 안 된다. 이윤추구를 지상목표로 삼는 장사꾼이나 싸워 이기고 이름을 날리는 데에 목숨을 거는 군인이 통치자가 되어 역할이 뒤섞이게 되면 사회는 혼란과 고통에 빠진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이상사회에서는 머릿속에 삽 한 자루만 넣고 다니는 사람, 머리는 남의 것을 빌리면 된다는 소리 하는 사람, 수첩에 적어놓은 것이나 읽는 사람은 통치자가 될 수 없다.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플라톤의 이상사회에서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이익, 즉 피통치자들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타의에 의해 통치자가 된다. 스스로 통치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다. 그런데 플라톤의 가르침 때문일 리야 없겠지만, 오늘날 뭔가 한 자리 하겠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신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혹은 서민들을 위해 본의 아니게 나섰다는 소리들을 한다. 쇼를 잘하면 그런 위선이 통하기도 한다. 결과는 대개 범사회적 고통과 혼란이다.
플라톤은 '피통치자들을 위한 통치'라는 말이 상투적인 구호로 둔갑할 수 없게 하는 장치를 나름으로 내놓는다. 통치자 및 그 후보들에게 극단적인 공유제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다. 그의 이상사회에서는 파워 엘리트들에게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배우자와 자식까지도 공유해야 한다. 그들은 통치에 대한 보답으로 일반인들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물품으로 검소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고작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혜를 사랑할 수 있도록 부단히 공부하고 단련해야 한다. 향락을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음악이나 문학도 건전한 것들만을 접하며 자라야 한다. 검열은 필수다. 어디 안가에서 파티를 즐기다 심복의 총에 맞아죽는 통치자는 아예 있을 수 없다.
다 이상적인 말 같기도 한데, 과연 그런 사회를 정말 이상사회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솟구칠 것이다. 공유나 검열이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것도 거북하지만, 인간 본성을 플라톤의 생각처럼 엄격히 구분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것이다. 본성들의 경계가 의심스러우면 그것에 근거한 일반인과 통치자의 구분도 불확실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파워엘리트들의 독선과 오류와,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고통을 역사 속에서 무수히 목격해온 민주시민들은 플라톤이 금기시하는 역할혼합 내지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다시 살려내고 싶을 것이다.
현실은 플라톤적 경계선 구분의 욕망을 넘어서 끊임없는 혼합과 절충과 양질전환들로 탁류를 이루는 듯하다. 싸움을 벌여 이겨도 얻는 것 못지않게 잃는 것이 있고 져도 잃는 것 이상으로 얻는 수가 있다. 이상사회로 가는 현실의 노정은 대부분의 구간에서 구불거릴 뿐 아니라 매우 질퍽하기도 하다. 그 질퍽한 대목들 가운데 유서 깊은 통일전선을 떠올릴 수 있다.
최악의 적을 소수로 몰아 제압하려고 입장을 달리하는 세력들이 함께 뭉치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한 방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최악의 적 다음에는 차악의 적이 있고, 그 다음에는 차차악의 적이 있다. 그렇게 입장이 다른 적들을 모두 제압하면서 어떤 이상사회에 도달한다는 생각이 어쩐지 편집증으로 귀결될 것만 같다. 말로는 함께 가자면서 늘 차악을 노려야 하거나, 그 차악으로 몰릴 수 있다는 강박이 따른다. 그런 논리로는 짧은 구간조차 함께 가자고 남을 설득할 수 없을 듯하다.
함께 갈 수 있으려면 적어도 소수 최악의 적을 제외한 다른 입장들 사이의 상호인정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상대에 대한 인정은 자신의 영역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상대를 소극적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인정은 자기변화를 전제한다. 상대로부터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여 자신을 바꾸고, 이 과정에서 또한 상대도 바꾸는 과정이 상호인정이다. 이 과정이 성공하는 만큼 이해관계 내지 권익의 공유, 참여, 분권, 민주 등등의 좋은 말들도 빛나게 될 것이다. 자기변화와 분권의 필요성을 진정으로 믿어야 통일전선은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변화는 원칙에 대한 배반으로 치닫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아직 인류는 분권, 내지 권익의 공유에 익숙하지 못하다. 독점욕의 비등과 이에 따른 혼란과 고통은 호시탐탐 인류사회를 노리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현실성 있는 변혁전략인 통일전선 역시 의문의 여지없는 완벽 지침이 될 수 없다. 허나 완벽하고 깔끔한 원칙의 아성 안에 머물면서는 이 질퍽한 현실의 한 구석도 바꿔내기 어렵다. 부단한 갈등의 재연 가능성을 감안하면서도, 사회적 혼란과 고통의 완화를 위해 힘을 모으고 한 걸음이라도 함께 질퍽거리며 내디딜 필요가 있다. 진정한 통일전선을 위해 통일전선이라는 말마저 버리자고 하면 너무 플라톤적인가?
[홍승용 칼럼 44]
홍승용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