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 성수기를 앞두고 최근에 아내와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강원도를 다녀왔다. 2년 전에도 평창과 오대산을 다녀왔지만 왠지 여름 휴가는 강원도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큰 고민없이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23년 전인 1987년 6월 고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설악산, 그것도 한계령을 다시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18살 소년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줬던 거센 한계령의 바람이 20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지금까지도 가슴을 서늘하게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만에 다시 찾은 한계령에서는 그러나 바람 대신 세찬 빗줄기가 우산도 없이 여행에 나선 중년 가까운 부부를 맞이했다.
그 다음날 찾은 백담사. 만해 한용운 선생 덕분에 '언젠가 한 번 가 봐야한다'고 막연히 생각해 온 곳이기도 했지만 일해 전두환 선생(?) 탓에 '꼭 가야 하나' 라며 망설이던 곳이기도 하다.마을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계곡을 돌아 한참을 산을 오르자 설악산 백담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초라하다는 느낌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한 켠에 만해의 흉상이 서 있었고 바로 옆에는 만해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고교 시절 국어시험에 등장하곤 했던 그의 시 '알 수 없어요'가 적힌 두루마리가 걸려 있었다. 오랜 만에 읊조린 그의 시는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만해박물관을 나와 절의 가장 중심인 극락보전에 다다랐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곳'이라고 쓰인 자그마한 방이었다. 그가 이 곳에서 살았던 것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극락보전 바로 앞 가장 첫번째 방이었다는 사실이 꽤나 놀라왔다.
그가 입던 옷가지며 생필품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추운 겨울 새벽에 장작을 패는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흑백으로 걸려있었다. 천년 고찰을 찾은 속세 사람들에게는 백담사니 만해 선생이니 하는 것보다 대웅보전 앞에 자리잡은 전직 대통령의 자취가 더욱 큰 관심거리인 것 같았다.
씁쓸한 마음으로 절을 나서면서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떠올렸다.
설악산으로 고교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1987년 6월 바로 그 때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던 노태우씨. 6.29 선언이라는 항복 문서를 읽어 내리던 그는 결국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권좌를 물려받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물 같은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전임자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수 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아직도 수 천억원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다.
그런 그의 동상이 최근 대구시 동구 신용동 팔공산 자락의 그의 생가에 세워졌다고 한다. 주민들도 잘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가족이 전격적으로 전신상을 만들어 세운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고 있다.
두 전직 대통령은 절간에 남긴 자취와 생가에 세운 동상을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을까?
"세상은 우리가 어떤 대통령이었는지는 점점 잊어갈 거야. 우리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만 두고두고 후세에 남게 되는 것이지."
백담사를 내려오는 내내 덜컹거리는 마을버스 속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비단 두 전직 대통령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
이 나라 최고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사람들이 功과 過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진보니 보수니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양쪽으로부터 일방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나 않은지, 그래서 한 세대만 지나면 그저 '대한민국의 몇 대(代)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태어나서 처음 가 본 백담사는 이처럼 내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전직 대통령들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뜻밖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주말에세이]
김용민 /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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