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잊혀진 역사 '10월 항쟁', 지역언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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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인정한 사건, 첫 '공식 추모제'...매일.영남 '스케치', MBC '단신'


“역사를 노래와 드라마를 통해 배울 거야?”,

KBS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
KBS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

3‧1절을 앞둔 2월 28일, KBS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샤우팅을 사랑하는 쿨한 형’ 장동혁이 국사과목을 선택으로 바꾼 교과과정개편안에 대해 던진 일침입니다. 

그는 “생각해봐. 틈만 나면 중국이랑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역사를 알아야 올바르게 대처할 것 아니야”, “그뿐만이 아냐. 역사를 드라마를 통해서만 배운 우리 애들은 헷갈릴 수 있다. 아니 삼국통일을 엄정화 동생(선덕여왕의 엄태웅)이 했어? 아니 송일국이 고구려를 세웠어? 송일국이 알에서 깨어났어?”라며 국영수 중심의 교육방식을 생각하는 어른들을 향해 쿨~하게 비판했습니다.

국사 또는 역사를 홀대하는 어른들의 생각방식은 교육정책 뿐만 아니라, 도시디자인, 지역역사를 외면하는 언론의 모습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디자인 서울, <날개> 이상의 주소지 없다.

<한겨레21> 2010.10.4(829호)
<한겨레21> 2010.10.4(829호)
문학평론가 함돈균씨는 최근 발간된 한겨레21 829호(10.4발행)에서 <디자인 서울에 이상의 주소지가 없다>며 “탄생 100년을 맞은 지금도 ‘불령선인’인 서울 토박이 이상. 디자인 서울을 한다면서도 기념비적인 토박이 문화자산을 자신의 유산으로 포섭할 생각조차 못하는 서울시의 무신경과 몰역사성”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자인 서울’의 한 복판인 광화문 옆 골목,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전위인 이상의 본적지와 생가는 시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방치된 채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돼 있다”며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타지 도쿄에서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 불령선인으로 체포됐다 죽은 이상은, 100번째 생일에도 생일상을 차려줄 자기 집이 없어 여전히 서울에서도 불령선인으로 남아있다”고 주장했하고 있는데요. 

‘불령선인’에 대해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란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들을 이르는 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비평대상이 된 ‘서울 토박이’ 이상이, 정작 ‘디자인 서울’에서 조차 ‘불온하고 불량하게’ 취급받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함 평론가는 “그의 집터에 소박한 문학관 하나를 디자인해주는 일을 소망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을 소망하는 일일까”라며 글을 맺고 있습니다.

대구의 잊혀진 역사… 10월 사건, 지역언론 '냉담'

대구에도 잊혀진 역사가 있습니다. 사건 발생 64년만인 2010년 3월, 정부기관에 의해 사건의 실재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언론의 관심은 소원합니다.

1946년 10월 대구에 대해 학자들의 연구논문 이외에 기록된 자료 몇가지를 보면요.

광복 60주년이었던 지난 2005년 대구MBC에서는 <대구현대사 재조명>을 주제로 두가지 보도특집을 마련합니다. 1부는 <4.19와 대구 : 민족민주운동의 광장을 열다>편이며, 2부는 <1946년 10월, 항쟁의 도시>입니다.

대구MBC 2005년 보도특집
대구MBC 2005년 보도특집
<1946년 10월, 항쟁의 도시>는 다음과 같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1년만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대구 10월 항쟁’은 그동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좌익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돼 왔다. 이 때문에 대구경북지역에서만 백수십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의 진상은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이 간절히 바랬던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과 일제 잔재의 청산, 국민의 생존권과 민주적인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국가 건설이 좌절되면서 일어난 민중의 저항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즉, 빼앗긴 해방을 되찾으려 한 민중의 항쟁이었다. 또한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존의 지배구조를 유지시키려한 미군정과 보수 반동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한편 발행된 <대구작가>(2010. 5) 12호에 「10월 민중항쟁은 복권되어야 한다」에서 함종호 4.9인혁재단 상임이사는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략) 미군정의 일방주의와 식량정책의 대 실패는 이남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이 분노의 숲에 불을 던진 역할을 하게 되는 대구항쟁이 1946년 10월에 발생한다. 그 시작은 10월 1일 노동자파업에 대한 경찰발포로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구시민들은 분노한다. 다음날 시청 앞에는 기아데모(굶주린 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 하는 시위)가 열리고 대구역 앞에는 어제의 노동자들이 재집결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십수 명이 사살 당한다.

마침내 삼덕동을 중심으로 학원가에서 분노가 폭발한다. 대구의전(현 경대의대)학생들을 선두로 삼덕동에 밀집된 남녀중고등학생이 총궐기하여 시민들과 함께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이제 대구는 권력이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성난 시민들은 친일경찰과 친일지주 및 고리채부자들의 집을 습격한다. 달성공원에서는 빼앗은 물건을 모아놓고,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야말로 해방구가 연출된 것이다. 대구의 해방구는 다음날 미전술군이 대구경찰서를 접수하면서 종료된다.(중략)


2003년 첫 공개 토론회, 2010년 3월 진실규명

대구 10월사건은 한때 ‘좌익 세력에 의한 동족 학살’등으로 규정되어 당시 유가족이나 피해자들이 ‘빨갱이’라는 멍에로 60여년을 숨죽이고 지내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연구되고, 사적인 자리에서 가끔 언급되었지만, 공직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공론화 된 것은 2003년 대한정치학회 추계학술세미나였습니다.

<매일신문> 2003년 9월 29일
<매일신문> 2003년 9월 29일

당시 이를 보도했던 <매일신문> 2003년 9월 29일 기사에 따르면 “57년전 격동의 해방공간 대구에서 발생한 10.1사건은 한국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그동안 학문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고, 이를 언급하는 것 조차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며 “‘좌익적 정치 세력과 민중의 공세적 국면에서 자행된 동족학살’이라는 다루기 힘든 문제가 개재되었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한정치학회장이었던 장병옥(계명대)교수는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10.1사건의 전개과정 및 그 후 한국정치에 미친 영향 등을 보다 철저히 규명하려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정치 현실이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 모색에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2003년 첫 학술세미나, 2006년 10월항쟁 60주년 행사, 2009년 10월항쟁 유족회 결성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문제가 서서히 대구지역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2007년부터 조사, ‘경찰에 의해 민간인 60명이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고. 그 중 김갑상씨등 6명에 대해서는 2010년 3월 30일 ‘국가가 책임있다’며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위령사업을 지원토록 권고하게 됩니다.

사건 발생 64년만인 2010년 3월, 정부기관에 의해 사건의 실재가 인정되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진실규명 결정서에는 1946년 10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사건의 배경

1946년 대구 10월 사건은 해방직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것 등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들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6년 9월 하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뒤, 이에 이어 10월 1일~2일 사이 대구에서 주민 봉기형태로 발행했다. 그리고 10월 6일까지 경북지역으로 번졌고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2. 사건의 원인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 미국 문서와 학계 연구문헌 등 여러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좌익세력의 운동 전술 변화 및 미군정과 대구경북지역 사회운동세력간의 관계 변화
둘째,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가혹한 식량공출정책
셋째, 해방직후부터 대구경북에 귀환동포 30만명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했으나 미군정이 대책을 세우지 않아 1946년 봄부터 자살자가 늘고 실업, 범죄 등 사회적 불안정성이 증대.
넷째, 한국인들이 일제강점기부터 경찰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심.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했던 한국인 관리 대부분을 등용했는데 경상북도와 대구부에는 국과장급 대다수가 일제관료 출신이었고, 일제말기 경북도의 경찰관 2,100명 가운데 873명이 한국인이었는데 이 대부분이 미군정에 임용되면서 이들의 비민주적 수사관행과 인권탄압 행위로 주민들의 반발(중략)


국가가 인정한 공식 추모제, 지역언론 '썰렁'

시민사회나 유족회 등이 주관했던 10월항쟁 희생자 추모제는 벌써 몇차례나 진행되었습니다. 언론이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올해 10월 항쟁 희생자 추모제는 과거와는 다릅니다. 국가기관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고, 지방자치단체 등과 함께 하는 공식추모제이지만, 지역언론의 관심은 냉담하기만 합니다.

올해 3월 30일 ‘대구 10월 사건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에게 많은 민간인들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되었다’고 국가기관에 의해 진실규명되었지만, 이를 보도한 지역언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3월 당시 천안함 사태로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서해로 집중되어 있던 터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0월 1일에 진행될 추모제 즈음에는 뭔가 이 사건과 관련된 기획보도라도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지역신문은 10월 1일 추모제를 스케치했을 뿐이고, 지역방송은 대구MBC만 이를  간단하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매일신문> 2010년 10월 2일 3면
<매일신문> 2010년 10월 2일 3면

<매일신문>은 10월 2일 <‘대구 10월사건’ 64년 만에 공식추모제, 격동의 세월 억울한 넋 고이 잠드소소>를 통해 <영남일보>는 같은 날 <6.25 전쟁 전후 영천 민간인 희생자 첫 위령제>에서 이 사건을 한단어로 언급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방송에서는 대구MBC가 <대구 10월 사건 희생자 위령제 열려>를 짧게 보도했을 뿐입니다.

<영남일보> 2010년 10월 2일 22면
<영남일보> 2010년 10월 2일 22면

국영수만 중시하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역사교육 외면’정책, 서울토박이 문학인을 외면하는 ‘디자인 서울’, ‘좌익세력에 의한 동족 학살’의 오명을 벗고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에 의해 많은 민간인들이 적법절차 없이 희생되었다’고 규명된 대구 10월 사건을 외면하는 지역언론.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역사, 현재의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 역사를 모르면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다” 등등. 역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2010년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오늘, 위의 정의들이 어느정도 실효성을 가질지는 의문입니다.

‘샤우팅을 사랑하는 동혁이 형’, 대구의 숨겨진 현대사를 외면한 대구지역언론에게 촌철살인의 메시지 하나 날려주세요.

※ 10월 사건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10월 사건, 유족회 및 학회 등에서는 10월 항쟁 등. 그들이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옮겨왔기에 이 글속에서는 두 용어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평화뉴스 미디어창 102]
허미옥 / 참언론대구시민연대 사무국장 pressang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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