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리는 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글 대신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보다 솔직하게 제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글을 어떤 얘기로 맺어야 하는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최근에 제가 한 부끄러운 일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성당에 다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독한 신앙을 갖지 못해 성당에 가서도 항상 뒷쪽에 자리를 잡습니다. 제게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진 날도 뒤에서 두번째 앞에 앉았습니다.
그 날 미사가 시작하기 전에 왠 남자가 옆에 와서 앉았습니다. 흰색 운동복 바지를 입은 30대 후반의 그 남자는, 연한베이지색 잠바를 입고 곤색 양말에 흰색줄무늬 운동화를 신은 “제멋대로” 패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주변에 텅빈 자리도 많았는데 하필 제 옆에 앉았습니다. 앉자마자 그 사람은 오른 다리 왼다리를 번갈아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옆눈으로 흘낏봐도 그 사람은 뭔가 달랐습니다. 옷은 깨끗하지만 너무 제멋대로이고, 태도도 산만하고 번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노숙자일을 맡아서했던 사람으로서의 직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미사 내내 상심이 들었습니다. 미사 중에 두번이나 제대 앞에 나가야 하는데 그 때 내 가방은 어쩐다? 이 사람이 슬쩍 집어가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심란해졌고, 저는 아이들보고 저 대신 봉헌하도록 하고 제자리를 지키기로 했습니다.
또 미사 중에 옆에 앉은 사람과 손을 잡고 노래를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보통 남녀가 함께 앉으면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손을 안잡습니다만, 그 사람이 손을 먼저 내밀어 손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겁날 정도로” 떨고 있었습니다. 전 이상한 기분이 들어 노래가 끝나자마자 성급히 손을 빼면서 그의 눈치를 봤습니다. 얼핏 본 그의 얼굴은 희고 여리고 착해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의심이 없어지질 않았습니다. 영성체 시간에도 이 사람이 앞에 나가지 않으면 가방을 들고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은 내 앞으로 먼저 나갔고 영성체를 마치고는 서둘러 제자리로 왔습니다. 그리고 나선 울음을 참는 듯 꺽꺽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그는 손으로 눈물을 대강 닦곤 성급히 나갔습니다.
그가 없어지자 전 한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미사시간 내내 잡생각으로 일관했는데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낙인찍은 그 사람은 제게 그 어떤 해도 기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 그 사람이 내 지갑을 집어갈까봐, 그리고 이상한 사람일까봐 마음의 벽을 세워놓고 그에 대한 경계로 미사시간을 일관했습니다. 소위 한동안 '노숙자' 일을 했다는 사람인 제가 노숙자에 대한 연민은 못가질 망정 누구보다 높은 마음의 벽을 스스로 세워두고 경계를 누추지 않은 겁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이 사회와의 관계를 맺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인 성당이라는 그 자리에서 “살아있는” 관계의 회복을 간절히 원해 어려운 걸음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관계를 섣부른 선입견과 판단으로 이미 단절시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성당에서 나를 위해, 약자를 위해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기도하지만, 나를 둘러싼 주변과의 어떠한 아픔도 공유할 준비도 안되어 있었던 겁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지식은 권위와 지위의 전시물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단견이지만 평화뉴스를 통해 제 소견을 얘기했습니다.
그 안에는 아마도 제가 학습한 식민지적인 잔재도 있을 것이고, 서구 중심적인 생각틀과 서가(書家)에서 얻은 지식만으로 현실을 짜맞춘 오류도 많이 범했을 겁니다. 또한 얼마 간 배운 지식만으로 그 흔한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우리 부모님세대의 작은 사례담만도 못한 얘기를 당연하다고 한 것도 있을 겁니다.
아직도 제겐 정리된 경험과 실천속에 만들어진 뼈있는 얘기가 많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아마 위 성당의 경험은 그런 오류가 나은 제 “껍데기” 행동의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단한 자기성찰과 자기부정이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권력화된 지식에 불과할 겁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지식은 아마도 권위와 지위의 전시물 정도에 불과하게 될 겁니다.
다 아시겠습니다만 지금은 토끼의 지혜보다 거북이의 끈기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쉽게 끝이 안보인다고 해도, 여러분들 자리한 그 곳마다 염천의 더위를 버텨낸 인내 이상의 끝이 있는 수확있으시길 빕니다. 그동안 설익고 부족한 글 읽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2004년 7월30일 중복에 김재경 드림
김재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방송인.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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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끝으로
평화뉴스 창간(2.28)과 함께 시작된 칼럼 [김재경의 세상 보기]가 휴식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마음의 글을 써 주신 김재경 박사님과
이 칼럼을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길지 않은 휴식의 끝에 다시 이 칼럼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는 8월부터는
김용락 시인(대구사회비평 발행인)께서 매주 목요일마다 칼럼을 쓰십니다.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7.30.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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