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C 공장을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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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 / "아프면 농성 풀고 나오면 된다?"


"처음엔 글쎄 생리대 반입도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듭 요청해서야 다음날 들어가게 되었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참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니에요?"

정문 밖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던 한 여성 노조원의 얼굴 위로 분노와 슬픔이 교차되고 있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10월의 구미 KEC공장 앞.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노조원들이 실외 난로 주위로 모여 시린 몸과 마음을 녹이고 있었고 정문 바리케이드 뒤로는 용역 회사 직원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저 그림자 뒤로 180명의 노동자들이 의지와 두려움을 부둥켜안은 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40일이라고 했다.

"쟁점이요?  쟁점이 없는 게 쟁점입니다. 우리는 회사 측이 뭘 원하는지 한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회사 측은 한번도 자신의 주장의 실체를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답답하고 답답한 마음에 10월 21일 공장 점거에 들어간 겁니다."

구미 민주노총의 한 간부는 벽을 앞에 둔 것 같은 막막함을 호소하며 우리를 안내했다.
노조의 진료의뢰를 받은 터였다.  KEC 공장을 찾은 우리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3명은 회사 측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공장 바깥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부터 진료를 하기로 했다. 사실 회사의 대답은 이미 회신으로 와 있는 상태였다. 오전에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협조 공문을 보냈지만 아프면 농성을 풀고 나오면 된다는 것이 돌아온 공문의 결론이었다. 

"오전에는 보일러 온도를 높여 놓고 저녁에는 꺼 버리는 장난을 치는 바람에 감기 환자가 많다고 합니다.  지부장은 공장 점거 일주일 전부터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공장에 들어가서도 지금까지 단식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괜찮을런지...."

단식을 하느라 혈당이 70까지 내려가 있는 한 노조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어떤 노조원은 산후 3개월인데 단식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왔다.  보고 있던 마음이 아팠던 터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의 마음도 저려왔다. 도대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일까? 140일을 입 꾹 닫고 버티는, 그럴만한 규모도 되어 보이지 않는 이 회사가 이렇게 버티는 것에는 다른 이유나 다른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다.

"의료진 출입은 절대 안 되고 약은 전해줄 수 있다는데요..."
한 노조원이 회사 측의 소식을 전해 왔다.  단식한지 오래된 사람들을 위해 수액과 주사제, 감기약을 조금 지어오고 다른 몇 가지 약을 챙겨왔지만 그게 어떤 약인지 어떻게 알고 복용하라는 것인지.  결국 우리가 직접 회사 측에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노무부장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저, 안에 들어가 진료 좀 하면 안 될까요?"
"누구시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 소속 의사들입니다."
"안됩니다."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것 같은데..."
"아프면 농성 풀고 나와 병원 가면 되잖아요?"

좀 회유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이 들어가 진찰하고 당신은 더 이상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되니까 농성 풀고 나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잖습니까?"
"안됩니다.  그럼 전화 끊겠습니다..."

벽에다 대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차라리 상대가 경찰이라면 화는 날지언정 이렇게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저들이 저토록 지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단의 하늘에 별들이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을 굶겨서, 노동자들이 아파서 항복하고 나올 때까지 공장의 바리케이드 같은 저들의 입은 닫혀 있을 것인지? 공장을 뒤돌아보며 나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180명의 스스로 고립된 노동자들.  그 중의 연약한 100명의 여성 노동자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시점에 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누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다시 한 번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우리는 KEC공장을 나서 커다란 공룡 같은 구미 공단 속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기고] 노태맹
/ 의사.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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