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의 금과옥조, 이제는 버려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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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 "형식적 객관화.역피라미드...맥락을 꿰뚫고 이야기로 풀어가라"


 미국의 AP통신이 세계 저널리즘에 기여한 바는 지대하다. 1848년 뉴욕의 6개 신문사가 공동출자하여 설립한 이 통신사는 저널리즘의 덕목 중의 하나로 꼽는 ‘객관성(objectivity)’을 창출했다. 주관성이 배제된 기사를 작성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그 때는 대부분 신문이 정파에 속해있을 정도로 당파성이 농후했다.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노골적으로 편들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정권을 획득하면 덩달아 관직을 하나씩 꿰차고 앉기도 했다. 정권획득을 도와준 대가로 관직을 사냥하는 이른바 엽관제(獵官制)가 시행되었다. 관직이 아니면 정부의 인쇄물이라도 독점하여 4년간 신문사 운영비를 충당하기도 하였던 때다. 그러나 여러 신문에 ‘뉴스’라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설립된 통신사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파에 속해있든 간에 모든 신문사에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해야 한다는 걸 알아냈다. 그게 바로 이념을 제거한 무미건조한 객관성이다. 광활한 대지에 마을마다 들어선 신문사에 뉴스를 팔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마케팅전략도 없었던 것이다.

 AP통신이 또 하나 창출해낸 것은 역피라미드라는 기사문장 구조이다. 남북전쟁(1861- 1865)이 발발하자 전황을 신속하게 보도하기 위해 역피라미드 구조를 찾아낸 것이다. 기사 전체의 핵심부분을 머리에 얹고 중요도에 따라 그 다음, 그 다음으로 서술하는 형태의 이 역피라미드 구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요하지 않아 뒷부분은 짤라도 하등의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전황 신속보도용으로 고안된 이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해 타전하면 데스크에서 지면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리드(lead)와 본문(body) 한 두 단락만으로도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또 전송비가 부담되면 중간에 끊어도 되는 경제적인 이점도 있었다.   

  객관성과 역피라미드

 ‘객관성’은 기사작성의 규범이고, ‘역피라미드’는 기사작성의 틀이다. 이 둘은 한 공장에서 나왔지만 목적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찰떡궁합이었다. 이 규범과 이 틀이 미국에서는 1900년경 완전 정착해 저널리즘의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었다.

 저널리즘의 덕목으로는 공정성 사실성 중립성 균형성 그리고 객관성이 꼽힌다. 저널리스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객관성’을 비중있게 간직한다.

 역피라미드 구조도 마찬가지이다. 기사 문장의 유형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사실보도기사인 스트레이트(straight)기사, 읽을거리 상자기사인 피처(feature)기사, 사설이나 칼럼처럼 의견이나 주장을 담은 에디토리얼(editorial)기사이다. 주관적인 에디토리얼기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2가지 유형의 기사는 ‘객관적’으로 작성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뉴스인 스트레이트기사는 거의 대부분 역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다.

 객관성과 역피라미드, 저널리즘의 이 금과옥조가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초반이다. 그 후 지금까지 기자 지망생이 관문을 뚫고 입사하여 수습기자가 되면 사내 교육을 통해 주입된다.

 “신문이 교과서다, 객관적으로 쓸 것, 스트레이트기사는 역피라미드방식으로 서술할 것, 기사가 넘치면 도마뱀 꼬리처럼 뒷부분을 짤라도 의미가 통하도록 말이다.”

 전문가의 입을 인용하는 기만적인 객관화

 이렇게 신문사는 기자에게 교육하고 그렇게 교육받은 기자는 자사 타사 할 것 없이 신문을 보고 그 틀을 익히느라 바쁘다. 틀이 생소한 수습기자에게는 익히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어떤 기사거리든지 그 틀 속에 집어넣어 중요도에 따라 배정하면 된다. 당황하지 않고 마감시간 안에 기사를 작성해 제출할 수 있다. 기분 좋게도 글 잘 쓴다는 칭찬도 듣게 된다. 무엇을 던져도 제때에 만들어내는, 유능한 기자의 반열에 오르게도 된다. 언제나 하루하루 기사거리를 발굴하고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기자에게 어렵게 배워 익힌 금과옥조에 대한 비판은 사치이다. 기자에게는 사치를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틀을 꽉 쥔 채 살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뉴미디어가 등장하였고, 올드미디어의 설 곳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에도 아직도 여전하다. 마치 지구온난화로 바다수위가 점점 높아짐에도 다른 도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전래되어온 도구만 손에 쥐고 있는 고립된 어느 섬의 원주민의 형상과 같다.

 객관성이, 역피라미드 구조가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했다면 이제까지 생존했을 까닭이 없다. 앞으로도 연명할 것은 분명하다. 주관성이 배제된 사실적인 기사작성은 아직도 저널리즘의 덕목을 향유하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무늬만 객관성을 띤, 실제는 주관적이면서도 형식적인 객관성이다. 기자가(또는 신문이) 의제(아젠다, agenda)를 설정해 놓고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의도한 대로 코멘트를 하는 전문가의 입을 인용하는 기만적인 객관화이다.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그렇게 작성되고 보도되는지 어느 신문을 들여다보더라도 채집할 수 있다.

 역피리미드 구조도 물론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수많은 정보를 알기 쉽게 정리하고 여과하여 핵심적인 사안을 맨 앞머리에 올리는 역피라미드 서술법은 상황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방식의 글쓰기의 획일성이다. 이 방식은 단정적 또는 규정적이며, 파편적 또는 편파적이며, 복수의 관점이나 다양한 관점이 아닌 하나의 관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서 독자가 사고작용을 통해 상황의 전모를 판단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규정한 대로 몰아가고 독자는 주입받는 식으로 편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취재원이 발표하는 내용 그대로 보도한다면 주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저널리즘의 덕목인 객관성을 견지한 보도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실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자세에서 객관성은 그 빛을 발한다. 그러나 기자가 기사거리를 찾아 나서는 순간, 객관성에서 이탈된다. 무엇을 취재할 것인가, 어떻게 취재할 것인가, 어떻게 기사화할 것인가, 이 모두가 객관적으로 다루어질 항목은 아니다. 이 모두가 주관적으로 다루어질 항목인 것이다. 이미 고민 끝에 프레임(frame)을 짜놓고 그 속에 들어갈 내용을 채우는 것, 그것이 객관성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객관성은 저널리즘의 오랜 덕목이지만 사실은 실현하기 어려운 덕목이다. 그래서 아예 공중 속으로 들어가서 주관적인 개인을 통해 사안을 설명하는, 객관성이 배제된 공공저널리즘이 더욱 솔직한 저널리즘인지도 모른다.

 형식적인 객관주의와 역피라미드 구조의 한계

 이에 반해 역피라미드 구조의 문제는 ‘객관성’처럼 실현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구조적인 한계에 있다. 이미 리드에 중요한 핵심을 배치해놓고 난 다음 풀어나가는 방식 그 자체가 다양성을 배제하는 한계를 지닌다.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나 그 사안의 배경, 그 사안의 맥락이 파고들 여지가 거의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역피라미드 구조의 한계 때문에 독자는 식상함을 느낀다. 신문기사의 첫머리, 곧 리드만 읽어도 그 기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알게 된 독자는 그만 더 이상 읽고 싶은 생각을 접고 만다. 읽을 재미도 없어진다. 30-40면 되는 하루분의 신문도 10분이면 족하다. 예전에는 그게 미덕이었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렇게 한 게 얼마나 되었는가. 독자가 신문을 받아들고 읽을 게 없다고 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그래서 점점 독자는 줄어든다. 그만큼 재미없게, 기사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요즘 전국적인 뉴스인 구제역 확산에 관한 일간지 기사에서도 형식적인 객관주의와 역피라미드 구조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 2010년 11월 28일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구제역은 한 달여가 지난 현재까지 그토록 방제방역을 했음에도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2236농가의 소 돼지 52만 마리가 살처분, 매몰되었고, 국민의 혈세 5200억원이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는 것. 참으로 주관성이 배제된 객관주의적인 기사이다. 피해확산 뉴스 속에는 전문가의 코멘트와 정부나 자치단체의 대책이 들어간다. 그 정도이다. 이따금 인터넷신문의 네티즌이 댓글로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왜? 그토록 방제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산되는가? 왜, 하필이면 이때 구제역이 발생하는가? 고의성은 없는가? 혹 구제역 발생과 구제역 확산으로 이득을 챙기는 쪽은 없는가? 왜, 그토록 빨리 살처분하는가? 살처분만이 최상의 방법인가? 동물학대를 감시하는 동물애호가단체는 이 동물집단학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널리즘은 사건이나 현상의 발생 자체보다 발생의 배경, 발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 맥락을 찾는 데에 주력해야한다. 이제 독자는 그게 궁금하다. 동남아 해외여행을 다녀온 축산농민이 그곳에서 구제역바이러스를 묻혀와서 전파한 것 같다는 관계당국의 유추에서부터 모든 발표에 이르기까지 의문을 갖고 진위를 점검해야 하는 게 저널리즘이다. 구제역에 대해서, 바이러스에 대해서 전공을 하지 않아 잘 모른다는 것과 발생의 배경과 맥락을 탐사하는 것은 별개이다.  

 저널리스트의 길

 의문을 갖는 것과 실제 탐사 결과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석연치않다고 조금이라도 생각될 경우, 독자를 위해, 축산농가를 위해, 특히 도덕적 가책이 없을 수도 있는 선의의 동남아여행 축산농민을 위해, 의문을 갖고 점검해야하는 게 저널리즘이다.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매년 소, 젖소, 돼지 사육두수의 변화, 쇠고기 돼지고기 가격의 변화, 쇠고기 돼지고기 수입현황 등등의 기초적인 자료를 수집하여야 하고, 직접 동물바이러스를 전공한 학자를 찾아가서 물어보아야 한다. 살처분 집행결정 이유도 알아보고 살처분 진행상황도 취재하여야 한다. 동물애호단체의 반응도 취재하여야 한다. 이러한 의문들을 모든 기관이나 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알아보고 대신 궁금증을 풀어주는 공과업을 독자들이 저널리스트에게 맡긴 게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저널리즘의 금과옥조, 이제는 버려야 할 때다. 완전 폐기가 아니라 버려야 할 때 버려야 한다. 그래야 저널리즘이 살아난다. 금과옥조의 창출국인 미국의 신문이 위기를 맞으면서 1990년대부터 그 한계를 인식하고 버리고 있기에 우리도 버려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학계의 이에 대한 연구보고가 쌓여가고 있어도 우리의 저널리즘 현장에서는 아직 고요하다. 우리의 신문도 이미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은 형식적인 객관주의를 지양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첨부하지 않는 것. 주입식의 역피라미드 형식이 아닌 이야기 형식의 기사를 쓰는 것. 곧, 리드에 핵심을 얹지 않고 기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첫 단락만 읽고는 독자가 모르도록 하는 문장구조를 채택하는 것. 사안의 배경을 파고들고, 그 사안이 어떤 맥락에 닿아 있는지 심층취재 하는 것. 기자가 정보의 전달자 - 육하원칙에 따른 기사작성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전달자 - 가 아닌, 해설자 - 사건 자체는 단순해보이나 그 사건의 배경은 무엇이며, 그 사건의 맥락은 어떠하며, 그래서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등 사안 전체를 꿰뚫어 볼 줄 아는 해설자 - 가 되는 것. 구제역이 아니라 다른 어떤 현상이 발생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 그게 저널리스트의 길이 아니겠는가. 새해 아침, 올해는 저널리스트에게 행운이 가득한 한해가 되길! 






[유영철 칼럼 12]
유영철 / 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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