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줄 수 있는 기자" - 대구일보 황재경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8.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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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이전에 먼저 따뜻한 사람이기를..."

기자에 있어 존재(存在)의 의미란 무엇인가?
앞날에 대한 불안감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당시 이공계 계열을 전공한 나는 취업 또는 대학원 진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전공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대학원 진학은 끔찍이도 싫었고 그렇다고 뾰족한 취업의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서울의 한 출판사에 다니는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된 모 방송잡지사의 일, 그것이 내 글쟁이 인생의 시작이었다.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지금의 신문사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숨 가쁜 수습기간을 거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쓴 기사 하나하나로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에겐 그것이 존재의 의미이자 기자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에는 나름대로의 존재의 의미가 있다.
경찰서를 출입하며 흔히 볼 수 있었던 범죄자나 들판의 쓸모없어 보이는 잡초들, 하다못해 강가에 널려있는 조약돌조차도 세상에 나온 그 나름대로의 역할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라며 거들먹거리며 살고 있는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초임 기자 시절 가졌던 가슴 벅찬 감정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잃어버린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존재의 의미는 출입처 장악과 얼마만큼 세상과 타협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 낼 수 있느냐라는 삐뚤어진 의미로 고정돼 버렸다. 그리고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생활을 핑계로 내가 살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도 이젠 귀찮은 일이 돼 버린 게 사실이다.

얼마 전 오른쪽 다리 연골에 암을 얻어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초등학생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딱한 사정을 소개한 내 기사를 보고 몇몇 독지가들의 도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조카뻘 되는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며, '수술을 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며 고개까지 숙여 가며 고마움을 전했다. 순간, 어쩌면 기자로서 나의 존재 의미를 이런 곳에서 찾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사회의 거대 부조리와 싸우거나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거창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조그마한 부분에서부터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소명이 바로 기자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글밥을 먹은지도 햇수로 벌써 3년째에 접어들었다.
한참동안 잊고 살았던 기자로서의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작은 부분에서부터 최선을 다하는, 기자이기 전에 먼저 따뜻한 인간이 되도록 기도해야겠다.

대구일보 사회부 황재경기자(yello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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