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총선이 2개월 앞으로 다가섰다. 대선도 이어진다. 새로운 권력을 움켜쥐려는 자, 권력에서 배제되지 않으려는 자, 그리고 그 권력 의지에서 자유로운 자들의 뒤엉킨 아우성으로 여기저기서 소란하다. 문제는 이 아우성의 정체다. 선거판이 되면 늘 겪게 되는 이 아우성들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과연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담론일까? 아니면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금융자본주의 독재의 결과인 고용 불안정, 빈곤의 폭발, 불평등, 생태적 재앙, 민주주의의 지체, 연대와 협력에 기반하는 인간관계의 거부 등을 지연시키려는 담론일까?
필자는 어쩌면 지금의 정치적 아우성에서 동떨어진, 그렇지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사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필자는 요즘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삶, 즉 생태적 삶이 가능한 사회를 자주 상상한다. 물론 그 상상 속에는 오늘의 분노와 내일의 희망이 함께 혼재해 있다. 추측컨대, 오늘의 분노와 내일의 희망에 익숙한 사람은 늘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 이러한 가치를 선택하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다. 바로 향년 75세의 미국 할리우드의 명배우이자 영화감독 로버트 레드포드이다. 그의 발언은 비록 정치적 아우성에서 밀려나 있지만 내일의 희망과 관련해서 중요한 지점이다.
한겨레신문 2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레드포드는 ‘제주도의 싸움: 군비 경쟁이 한국의 낙원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제주도 강정리에서 강행되고 있는 해군기지 건설의 환경파괴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그는 “수마일에 걸친 산호초 해안에 4층 건물 크기의 탄약고 57개가 들어선다면 환경생태계가 파괴되며 어떤 연쇄작용일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문화적, 환경적 독특함을 간직한 한반도 남단의 섬 제주의 원시 해안에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전세계에 고발하고 있다.
레드포드는 특히 “제주 해군기지는 미국이 이지스 탄도미사일 시스템으로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과 항공모함 잠수함 이지스구축함 등을 위한 대형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한국 정부의 야욕에서 비롯한 것 같다”며 “이미 수백에이커의 비옥한 농장이 콘크리트 건물들을 위해 불도저로 파헤쳐졌으며, 이런 탄약고들은 이같은 ‘죽음의 지대’를 바다로까지 넓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환경보호론자, 평화활동가, 민주주의 지지자들이라면 우리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다”며 제주도 구하기 캠페인 누리집(www.savejejuisland.org)을 방문해 행동에 나서자고 제안했다. 레드포드는 끝으로 “비밀주의와 위선이 제주 해군기지를 추진했다”며 “사실과 행동만이 너무 늦기 전에 이를 멈출 수 있다”고 촉구했다.
지금 세계에는 방관자들, 즉 전쟁, 테러, 금융자본주의, 테크놀로지의 변화 등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외딴 태평양의 섬이나 아마존 삼림에서 사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환경문제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천연자원을 노리는 상업적 탐욕의 침탈을 받지 않을 경우 방관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적인 사건들로부터 동떨어진 방관자로 살아갈 수 없다.
한 국가는 국제적으로 서로 밀고 당기는 영향력의 탄도로부터 벗어나거나 면제를 주장할 수 없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결과다. 세계시민들은 전쟁의 최전선에 나선 병사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포격과 약탈에 시달리고 대규모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자신의 안방마저 과녁이 되고 있다. 제주도 강정리가 지금 꼭 그런 형국이다.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레드포드는 우리에게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방관자는 없다. 이 말은 곧 모두가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다. 물론 행동이 없는 것도 하나의 행동이다. 즉 아픈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관련의 방식은 선택이 가능하다. 목격자, 희생자, 투사도 있고, 희생자를 돕는 역할도 있다. 항상 희생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언제나 분명한 사실이다.
달아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심리적 도피의 경우 더욱 그렇다. 도피란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에서도 누구나 어느 정도 신체적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그 위험의 근원들, 즉 사람들 사이의 분노, 의혹, 증오를 인식하고, 숙고하고 해소하는 것을 회피하는 태도를 뜻한다. 어쩌면 지금 제주도 강정리에서 벌어지는 파괴행위야말로 우리의 방관자적 태도가 낳은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안방이 과녁이 되고 있다. 정치적 아우성에서 제대로 짚고 살펴야 할 이유다.
[이재성 칼럼 33]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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