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사실상의 승자 독식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공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상대 당 후보자와 전면전에 돌입했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공천 후유증이 심각하다. 한 번 뛰어보지도 못하고 탈락한 사람들의 저항선이 생각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동일한 반응 하나는 자기가 왜 탈락이냐는 자기 주문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자기만큼 열심히 당과 지역(더 나아가 애국까지 들먹인다)을 위해서 일한 사람이 왜 공천에서 탈락되었는지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변한다.
시작부터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리고 새로운 경쟁을 준비한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 피아가 구별이 없는 난타전이다. 볼썽사나운 풍경이지만 이것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이 난투극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특정 당이나 언론, 시민사회단체 등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독점해서 그들의 방식대로 국민의 정치적 의사결정권을 선점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전유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정치활동을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실천적 지혜’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은 이론적 척도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종교적・도덕적・사회적 이념 내지 신념을 전제한 후에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는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수단과 목적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이다.
조금은 낯설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정치활동의 구체적인 예로 김제동을 들고 싶다. 김제동은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MBC・KBS・YTN 방송 3사 연대파업 콘서트 ‘방송 낙하산 퇴임 축하쇼’의 토크 연사로 무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그는 어릴 적 동네 이장이 주민들에게 소의 죽음을 알린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장님은 소의 죽음을 정직하게 알릴 줄 알았고, 마을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던 이 시대 참 언론인”이었으며, “우리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 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언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의 이야기’는 함께 나누는 모든 것이 되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등록금 낮추자. 애들 밥 주자. 언론 독립 보장하라’고 말하면 빨갱이라고 한다. 희한하다.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 같은 나라 만들지 말자고 지금 얘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실천적 지혜’의 중요성을 확인해 주었다. 또 “YB가 평양에서 방송을 하자 평양 시민 98%가 알아봤다더라. 방송이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시청률 98%가 나온다. 끔찍하지 않냐. 하나의 목소리만 나오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지 말자고 얘기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며 아직도 여전한 대한민국 의사결정 과정의 경직성, 즉 ‘빨갱이 신화’를 토로했다.
그 외에도 김제동은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선거철만 되면 여야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관등성명을 대러 온다. ‘기호 1번 누구입니다’, ‘기호 2번 누구입니다’. 그러나 당선만 되면 바뀐다. 국민들한테 관등성명을 대라고 한다. ‘너 누구냐? 뭐하냐?’라고 한다. 싹 바뀌는 것이다. 늘 국민들에게 관등성명 대야 하는 게 그들의 의무이고, (국민들도)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서 “4년, 5년짜리 대표적인 비정규직이면서 정작 비정규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정치의 부재를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정치의 부재, 의사결정 과정의 경직성으로 덧칠된 기존의 정치적 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특정 당, 언론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우리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의사결정 과정에서 모든 것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정치’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과 성공만을 위해 노력하는 멍청한 대다수의 사람들과 소수의 도덕적으로 의식 있는 사람들로 양분된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당장 ‘이성의 사적 사용’을 중단하고 ‘이성의 공적 사용’을 실천해야 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진정한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현상 분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전문가가 아니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사회는 각각의 영역에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 폭넓게 사유하고, 전 지구적 시각을 가지며, 철학적으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들만이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해야 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사유해야만 한다.
[이재성 칼럼 34]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