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계란 장수, 일흔 할아버지의 종소리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2.0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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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복(74) 할아버지 / "애환 없으면 거짓말...내 남은 인생은 덤"


백발의 할아버지가 굽은 허리로 식당가를 돌아다니며 종을 흔들었다. '딸랑, 딸랑,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는 쉰 목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식당 문을 열고 "계란 필요해요?"라고 묻기도 했지만 손사래만 돌아왔다. 자전거를 끌고 더 깊은 골목길로 들어가자 종소리도 희미해졌다.

31일 오전 10시. 대구에서 45년째 계란을 팔고 있는 권유복(74.대구 수성구 범어동) 할아버지는 이날도 아침부터 30년 된 낡은 자전거를 끌고 계란을 팔러 나왔다. 중구 동인동1가에 있는 식당가를 찾았지만 "필요 없다", "다음에 사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골목 입구에 세워놓은 자전거가 신경 쓰였지만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손잡이 종을 흔들며 더 깊은 골목의 식당 문도 두드렸다.

종을 들고 중구 동인동에 있는 한 식당 문을 여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종을 들고 중구 동인동에 있는 한 식당 문을 여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종소리가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손잡이 종을 겉옷 속주머니에 넣고 대신 두 손을 모아 "계란 사세요"라고 외쳤다. 그제야 한 식당에서 아주머니가 쫓아 나와 계란 2판을 샀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기다렸어요"라고 아주머니가 묻자 할아버지는 "계란이 무거워서 오다 쉬어서 그래"라고 답했다.

다시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워놓은 곳까지 걸어와 자전거에 묶여 있던 손때 묻은 나무 상자에서 계란 2판을 꺼냈다. 아주머니가 "돈은 나중에 줄게요"라고 미안해하자 할아버지는 "괜찮아. 지난 번 돈도 다음에 같이 줘"라고 말했다. 골목길에서 나온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는 대신 자전거 손잡이를 두 손으로 끌고 대로로 나왔다. 그리고, 자전거에 달린 작은 스피커를 켠 채 칠성동으로 이동했다.

권 할아버지는 매일 오전 9시 범어동에 있는 한 양계장에서 계란을 떼와 동구 신천동부터 중구 동인동, 북구 칠성동, 침산동까지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45년째 계란을 팔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란 20판을 자전거 뒤에 올려놓고 저녁 6-7시까지 골목길을 누빈다. 자전거는 녹이 슬어 원래 색을 알아보기 힘들고 안장은 가죽이 헤져 여기저기 테이프가 붙어있다.

자전거에서 계란 2판을 내리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자전거에서 계란 2판을 내리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아버지는 한판에 4,600원하는 계란을 팔아 할머니와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네 골목마다 들어선 슈퍼 때문에 장사는 예전만 못하다. 이일을 처음 시작했던 1960년대보다 계란 원가는 10배나 올랐지만 수입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 5년 동안은 월 평균 50-60만원 밖에 벌지 못한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세상 구경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돈도 벌 수 있어 즐겁다. 애환이 없으면 거짓말이겠지만 살아있는 사람 다 그렇지 않겠냐"고 털어놨다.

30분 동안 계란이 가득 실린 자전거를 끌고 이동한 탓인지 할아버지 발걸음은 느려졌다. 잠깐 자전거를 벽에 세우고 모자를 벗어 땀을 닦고 허리를 펴 하늘을 쳐다봤다. "젊을 때는 계란 싣고도 쉽게 자전거를 탔는데 나이 드니까 안돼. 몇 번 탔다가 계란 한 트럭 깨먹었지"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대구시청 골목길을 나와 고서점이 즐비한 길목에 왔을 때는 몇몇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길을 매일 지나가니까 다들 알아보지. 오매가매 커피도 마시고 비를 피하기도 하고. 다들 젊었는데 그새 나이가 들었네...이제 친구지"라며 할아버지는 미소를 띄었다. 

점심시간 쯤 할아버지는 칠성지하도에 도착했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반복돼 자전거가 무거우면 이동하기 힘들다. 할아버지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계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칠성시장으로 이동해 식사도 하지 않고 계속 종을 흔들며 계란을 팔았다. "좋은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지. 안되면 종이라도 신나게 흔들고 목소리도 더 크게 지르면 돼"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계란이 가득 실린 자전거를 끌고 칠성지하도를 지나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계란이 가득 실린 자전거를 끌고 칠성지하도를 지나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권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1937년 경북 안동 길안면 현하리 '팽목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생 7달 전 세상을 떠났다. 남은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머슴살이로 받은 밭을 일구기 위해 경북 성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산과 들로 농사를 지으러 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는 문턱조차 밟지 못했다.

대신 한글은 어머니에게 배웠다. 어머니가 담벼락에 '가, 갸, 거, 겨'라고 쓰면 할아버지는 누나들과 함께 흙바닥에 따라 적었다. 동네 또래들도 대부분 농사를 지어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몇몇 아이들의 교복과 흰색 이름표를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농사에 매달린 덕분에 밥은 굶지 않았고 살림살이도 나아져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의 '총동원물자사용수용령' 실시로 놋그릇, 숟가락, 쟁기 등 온갖 쇠붙이로 된 세간을 도둑맞았고, 누나들은 인천에 있던 방직공장으로 끌려갔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평화가 오는 듯 했지만 또 6.25 전쟁이 일어나 할아버지는 청송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3년. 할아버지 가족은 대구 중구 동인동 단칸방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골목길에서 종을 울리며 "계란 사세요"를 외치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골목길에서 종을 울리며 "계란 사세요"를 외치는 할아버지(2013.1.3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처음에는 빵공장에 취직했다. 월급은 못 받았지만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나염공장, 방직공장에서도 일했지만 월급은 200원 남짓. 그 마저도 못 받을 때가 있었다. 때문에, 29살이 되던 해 '계란장수'를 하던 넷째 누나를 따라 이 일로 접어들었다. 자전거를 도둑맞거나 눈길에 넘어져 척추가 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못 먹고 못 입었다.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도둑질도 하던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지금의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낳았다. "자식들이 클 때는 계란 파는 게 신났다. 밥 넣어주면 오물오물 씹는 입이 참 예뻤다. 이제는 학교도 다 졸업했고 결혼도 다 했다...내 남은 인생은 덤"이라며 할아버지는 말했다. 또, "험한 풍파 속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장부이자 선비 같았던 어머니, 고마운 누이들, 자식들, 그리고 할망구 덕분에 살 수 있었다"며 "세상 떠날 때까지 욕심내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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